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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벌거벗은 임금님

계몽된 허위의식과 냉소적 이성

영화 한편 때문에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가 생각나는 시절이다. 언론은 적나라한 그 영화에 화려한 옷을 입혔다. 하지만 대중이라고 어디 눈이 없겠는가? 지난번의 학습효과 때문인지 이번엔 다수의 대중이 영화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물론 존재하지 않는 그 화려한 옷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들도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의 도전정신에 10점을 준다”, “그래도 아이와 가족이 보기에 좋은 영화다”. 그중 압권. “영화를 보며 웃지 못하는 것을 보니 내가 동심을 잃었나봐요.” 하긴 그 화려한 옷은 마음이 착한 사람에게만 보인다지 않던가.

벌거벗은 임금님

흥미로운 것은 기사를 쓰는 기자들의 태도. 그들은 관객 ‘100만 돌파’니, ‘200만 돌파’니 연일 지면에 흥행성공의 승전보를 전하기에 바쁘다. 초등학교만 나왔어도, (관객 수X관람료/2)-(제작비+마케팅비)=음수인지 양수인지, 장부에 적힌 숫자가 적색인지 흑색인지는 분별할 거다. 사태가 객관적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 거다. 그런데 대체 왜 저런 허황한 장밋빛 기사를 쓰는 걸까? 누구에게 속아서 그러는 것은 아닐 거다. 기자 노릇하면서 설마 사칙연산을 모르겠는가? 그들 역시 사태를 잘 알고 있고, 다 알면서 거짓말하는 거라 봐야 할 거다.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저 기자들의 태도는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들이 쓰는 기사가 거짓임을 안다. 하지만 참말을 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또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중의 입을 대변한다는 언론의 고전적 임무는 오늘날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들에게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창피해 하기는커녕 아마도 자기들이 그래야만 하는 수십 가지 합리적인(?) 이유를 댈지 모르겠다. 독일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이런 것을 ‘냉소적 이성’이라 불렀다.

마르크스는 고전적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을 이렇게 기술한다. “그들은 모른다. 그러나 행한다.” 이데올로기가 이렇게 작동한다면 그저 진실을 알림으로써 대중을 이데올로기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거다. 계몽의 프로젝트란 결국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임금님은 실은 벌거벗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기자들의 경우는 어떤가? 설사 그들의 기사가 허위임을 폭로한다 해도, 그들이 거짓말하기를 멈출 것 같지는 않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들은 안다. 그런데도 여전히 행한다.” 냉소적 이성은 이렇게 이미 ‘계몽된 허위의식’이다.

냉소적 이성은 오늘날 보수주의 일반의 특성이 되었다. 아니, 아예 대중의 존재미학이 되어버렸다. 80년대만 해도 사회는 계몽주의적이어서, 시민이나 민중의 의식을 각성하여 억압에서 벗어난다는 기획은 보편적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오늘날은 어떤가? 두번의 집권을 통해 ‘민주’가 부패할 수도 있음이 드러났고, 사회주의 몰락으로 ‘평등’이 억압이 될 수 있음이 밝혀졌다. ‘시민’의 자발성도 사회를 바꿀 수 없고, ‘생태’로 환경의 파괴를 막을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냉소주의가 외려 ‘쿨’한 태도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고전적 이데올로기 모델에 집착하는 이들은 여전히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는 외침으로 대중을 ‘계몽’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오늘날 대중은 몰라서 임금님 옷에 감탄하는 게 아니다. 여기에는 뭔가 파타피지컬한 면이 있다. 대중 역시 그 옷이 존재하지 않음을 모르지 않으나, 그럼에도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양 행세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외치면 얼마나 썰렁하겠는가. 그것은 사실 지젝이 인용하는 라캉의 농담과 다름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저 아가씨 좀 봐요. 어휴, 창피해라. 입고 있는 옷 아래로 홀딱 벗었어요!”

물론 고전적 모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언론은 특수계층의 이해를 사회보편의 이해로 포장하게 마련이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정말 몰라서 그 이데올로기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 그런 이데올로기라면 ‘계몽’을 통해서 얼마든지 해체할 수가 있을 거다. 하지만 냉소적 이성은 다르다. 그것은 이미 ‘계몽된 허위의식’이기에, 계몽을 통해 해체할 수가 없다. 그게 문제다. 오늘날 대다수의 대중은 국가와 시장, 정치나 언론에서 떠드는 애국적 수사의 배후에 특수계층의 이해관계가 있음을 이미 안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모를 때와 다름없이 행동한다.

그래도 여전히 행한다

그 영화를 정말로 ‘재미있게’ 본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누구나 일상적으로 접하는 한국영화나 드라마의 수준을 볼 때, 그 영화를 정말로 ‘재미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보고 ‘재미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왜 그럴까? 물론 ‘솔직히 재미없다’고 고백한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마저도 결국엔 감독의 ‘도전정신’을 들어 별 다섯을 던진다. 심지어 영화가 재미가 없는 게 감독 탓이 아니라 자기 탓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들 역시 그게 다 자기가 동심을 잃은 탓이라 자책하며 별 다섯을 던진다.

“그들은 모른다. 그러나 행한다.” 영화의 문법에 무지해서 그러는 것이라면 관객에게 졸작과 걸작을 구별하는 방법을 설명해주면 그만이다. 거기에 설득당할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관객은 그 영화가 수준이 낮음을 안다 해도 여전히 별 다섯을 던지려 한다. “그들은 안다. 그런데도 여전히 행한다.” 여기서 합리적 설득은 애초에 가망이 없다. 아무리 작품을 분석해주고, 비평의 기준을 설명해도 그들은 여전히 작품의 질에 상관없이 별 다섯을 날릴 테니까. 여기서 미학적 계몽의 시도는 좌초한다. 이것은 더이상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이는 하찮은 소극(笑劇)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날엔 이데올로기가 어느 영역에서든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여전히 그런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이상적 담화상황’이 주어진다 해도, 거기서 이루어지는 토론의 결과로 대중이 행동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물론 그게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데올로기 비판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의식의 비판이 아니라 신체의 비판, 즉 (허위)의식과 싸우는 수준을 넘어 무의식 속에 도사린 욕망과 대결하는 유물론적 비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데올로기 이후(post-ideology) 시대를 지배하는 ‘냉소주의’(Zynismus)의 대안으로, 슬로터다이크는 고대의 ‘견유주의’(Kynismus)를 제안한다. 왜 그럴까? 널리 알려진 것처럼 견유주의자들의 비판은 철저히 유물론적이었다. 그들은 아카데미에서 ‘머리의 지식’을 추구하는 대신에 장바닥에서 ‘신체의 지혜’를 연출했다. 가령 견유주의의 대명사 디오게네스는 머리로 논증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신체로 퍼포먼스를 했다. 그가 하는 비판의 형식은 오줌, 정액, 제스처이며, 비판의 내용은 뻔뻔한 독설, 얄미운 조롱, 신랄한 풍자였다.

이미 모든 것을 아는 ‘계몽된 허위의식’이기에 냉소적 이성은 결코 논증만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논증이 외려 결국 냉소를 교육시켜 더 강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따라서 비판은 촉각적이어야 한다. 다다이스트들의 도발적 퍼포먼스처럼 견유주의는 충격을 통해 차가운 냉소로 얼어붙은 사유와 습속에 균열을 낸다. 슬로터다이크의 말대로 냉소의 시대에 철학은 장바닥으로 내려와, 무례함과 뻔뻔함을 가지고 냉소를 냉소해야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