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노동자가 자신을 해고한 사장 가족을 해치러 간다. 얼핏 리얼한 사회파영화 같지만 <죽이러 갑니다>의 실상은 다르다. 팔이 잘려도 다리가 잘려도 사장 가족은 살아서 엎치락뒤치락 노동자와 대치한다.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엽기적인 웃음은 배가된다. 코믹과 스릴러가 뒤섞인 기발하고 독특한 구성. 이 영화를 연출한 박수영 감독이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개봉 순서로 보자면 두 번째지만 <죽이러 갑니다>는 박수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먼저 개봉한 영화는 유아실종 사건을 무거운 스릴러톤으로 그린 <돌이킬 수 없는>. 데뷔작과 사뭇 동떨어진 선택이다. 아무래도 이 감독에게는 친절한 주석을 달아줄 필요가 있다. 박수영 감독은 중산층 가족의 일상과 핵무기 발사를 엮은 <핵분열 가족>(2005)부터 초능력을 갖게 된 소년의 세계를 그린 <마이티맨>, 버려진 개의 복수극을 그린 <9시5분>의 ‘가족 같은 개, 개 같은 가족’ 같은 단편 작업 등, 마이너한 감성과 장르의 결합으로 독립영화계의 스타였다. 영화를 통해 그가 견지하고자 하는 핵심을 물었다.
-장편 데뷔작인데, 두 번째 작품인 <돌이킬 수 없는>보다 오히려 개봉이 늦었다. =작은 영화라 당연히 미루어졌을 거라 생각하는데 사실은 좀 다르다. 배급사도 정해져 있었고, 작은 영화라 오히려 개봉하기가 쉬웠다. 원래 지난해 6월 개봉하려고 했는데 <돌이킬 수 없는>을 먼저 개봉하고 나면 이 영화에 관심을 더 가져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한국이 월드컵 16강 진출할 것 같더라. 월드컵 때문에 안된 영화, 많이 봤다. 대한민국 축구를 믿었다. (웃음)
-독특한 장르다. 해고노동자라는 소재가 있지만, 리얼리티 대신 코믹으로 풀어간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단편을 함께 연출한 동생(박재영)이 <번개>라는 짧은 시나리오를 써둔 게 있었다. 젊은 남자 넷이서 사회봉사를 갔는데, 절름발이 남자가 ‘너희 도움 필요없다. 나는 내 나름의 삶이 있다’고 거부한다. 남자들이 다음날 또다시 이 남자를 찾아가서 싸움이 일어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야기가 매력이 있더라. 그걸 확장해서 여기까지 왔다. 단편 <핵분열 가족>도 가사노동하는 엄마에게도 억울한 측면이 있다는 데서 시작했다. 코믹하게 푼 건 약간 우격다짐이 없지 않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 있는 게 원래 코미디다 보니 말이 안되더라도 웃음을 유발하는 데 기여하면 그걸 취했다.
-순제작비 1억원 내외의 저예산영화다. 배우나 스탭 구성을 볼 때 무리가 아니었나. =원래 30분 단편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캐스팅이 잘됐고, 스탭들도 장편으로 하면 동기부여가 더 잘될 것 같다는 합의가 있었다. 영화진흥위원회 지원금 1천만원. 결혼 전에 원고료로 모은 돈 5400만원. 전세 빼고 월세로 해서 마련한 3천만원. 어차피 상업영화로는 찍기 힘든 작품이니 기술적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더라도 한번 해보자 싶었다. 내 절박함이 스탭들에게도 통했는지, 영화 시작하면서 일이 잘 풀렸다. 촬영팀 덕분에 카메라도 HD를 쓸 수 있었고, 조명도 갖추어졌다. 퍼스트급 스탭들은 개런티 대신 작품 투자형식으로 계약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배우를 고생시키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웃음) <돌이킬 수 없는>에선 김태우에게 생전 처음으로 액션을 시키더니, 이 영화에선 이경영을 비롯해 온 가족이 몸싸움에 나선다. =(웃음) 그래서 지금도 (김)태우 선배랑 잘 지낸다. 고생을 해도 다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믿고 파이팅하는 것 같다. 태우 선배는 연기 잘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새로운 모습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작품에서 (이)경영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잘하는 것보다 왠지 잘할 수 있는 걸 찾아주는 게 관객에게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배님이 보시기엔 신인감독이 날 죽이려 드나 하겠지만’ 믿고 한번 해달라고 부탁했다. 본인도 몰랐던 것을 해보자. 성공과 실패를 넘어 자체로 진심이 있겠다 싶더라.
-듣고 보니 배우가 금방 설득당했을 것 같다. =경영 선배가 연기한 해고노동자 캐릭터는 영화에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해야 했다. 노동자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연민이 가는 대상이었으면 싶었다. 영화 경험이 많은 검증된 배우와 함께하고 싶은 연출자로서의 욕심도 있었다. 다행히 경영 선배가 시나리오를 보고 새벽까지 생각나더란다. 이 영화 골 때리는구나 하고. 이 영화가 코미디인지 단박에 알아보더라. 내 영화를 알아주는 사람과 작업할 수 있게 된 거다.
-<돌이킬 수 없는>을 비롯해 이 작품까지 사회적 약자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선 짚어봐야 한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다. 보통 야구를 보더라도 특정 지지팀이 없다면 지고 있는 팀을 응원하는 게 일반적인 사람의 심리다. <돌이킬 수 없는>에서 세진(이정진)을 가해하는 사람들은 중산층 이상의 사람이다. 사회적으로 안정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약자를 소리소문없이 배척하는 것이 현실이다. 가해자를 나쁘게 그린다기보다 관객 역시 내가 그런 가해자 입장에 처할 수 있다는 공감을 주는 것이다. <죽이러 갑니다>에선 반대로 약자가 가해를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돌이킬 수 없는>과 다르지 않다. 한 남자가 일가족의 팔다리를 자르는 복수를 했다, 오죽했으면 쥐가 고양이 코를 물었겠나 하는 물음인 거다.
-영화에서 약자도 여러 유형으로 정의된다. 전반부의 약자(해고노동자)가 사장 가족에게 가해를 한다면 후반부의 약자(백숙 배달부)는 되레 사장 가족에게 피해를 입는다. =배달원은 노동자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노동자는 ‘씨발, 다 죽여버릴 거야!’라고 악다구니하지만, 배달원은 ‘사장님, 사장님’ 하면서 굽실거린다. 다 같은 사회적 약자인데 한 사람은 악을 쓰고, 한 사람은 순응한다. 그런 인물들이 궁지에 몰리면 둘 다 강자인 사장을 죽이려고 한다. 그런데 결국 둘 다 당하는 건 마찬가지다. 두 사람 모두 이 사회의 피해자에 불과한 것이다.
-막상 강자인 가족도 문제는 발생한다. 위기 앞에서 맥없이 무너진 채 다들 제 살길에 급급하다. =노동자가 국민이라면 부유한 사장 가족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테이블까지 뛰어오르는 국회의원들 같다. 자본주의 사회니 돈 있는 자가 강해지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반칙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발 논리에 급급해서 약자들은 무조건 짓밟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지금의 사회다. 대한민국의 국가적 위상도 이제 많이 높아지지 않았나. 조금 발전이 더디더라도 나누면서 산다면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주제를 견지하지만 <죽이러 갑니다>는 코믹 스릴러 형식, 두 번째로 만든 <돌이킬 수 없는>은 사회파 스릴러다. 사뭇 간극이 커 보인다. =그게 지금의 내 고민이다. 두 영화 모두 열심히 찍었는데, <죽이러 갑니다>는 코믹이라서 더 신나게 했던 것 같다. 그런 고민에 사로잡혀 얼마 전에 <돌이킬 수 없는>을 좋게 본 관객의 인터넷 평을 60개 정도 모아서 그분들께 메일을 보냈다. 박수영 감독인데 이번에 또 다른 영화가 개봉한다. 그 두 영화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알고 싶다고 보냈다. 그때가 새벽 1시였으니 그냥 순진한 생각에서 한 것 같다.
-그래서 해답은 좀 얻었나. =고민은 지금도 계속된다. 그런데 두 영화가 가진 교집합이 내 특기이자 장점이란 생각이 든다. 그게 단편 때부터 나를 수식하던 ‘장르영화, B급영화, 마이너영화’는 아닌 것 같다. 메인 요리로 스테이크를 만든다면 마이너한 취향은 거기 뿌려지는 향신료 같은 역할일 뿐이다. <죽이러 갑니다>는 그 양념이 효과적일 것 같아서 간 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처럼 아동 성범죄와 인권을 다룬다면 좀더 묵직한 양념을 사용하는 거다.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문제가 제법 또렷하다. 영화를 시작한 계기도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웬걸, 공부하기 싫어서 영화를 시작했다. 원래 법대를 다녔고, 3당4락으로 공부만 하는 스타일이었다. 검사가 되려고 한 거다. 그런데 문득 검사가 되면 평생 공부만 하다 죽을 것 같더라. 다니던 법대를 그만두고 수능 봐서 한양대학교 연영과에 들어갔다. 텍스트로 하는 공부가 아니고 진짜 뭔가 몸으로 부딪힐 수 있는 걸 하고 싶었다. 당시엔 집에서 반대도 심해서 아버지가 친구들 만나면 신방과 다닌다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가 오히려 적극 후원해주신다. 이번 영화는 손이 모자라다 보니 아버지가 직접 운전까지 하며 제작실장 몫까지 해주셨다.
-죽자 사자 공부에 매달린 고시준비생이었다면, 영화에 대한 욕망이 그리 강하지도 않았을 텐데. =고등학생 때까지 본 영화가 두편이었다. <시스터 액트> <투 문 정선>. 그걸 보고 영화를 시작한 건 아니고, 그만큼 영화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사람들이랑 대화를 하려면 뭐라도 봐야 했고, 그래서 영화마을에 가서 1만원 예치하면 300원 하던 비디오를 닥치는 대로 봤다. 입학 전 오리엔테이션 전까지 하루 7~8편, 사법고시 공부하듯 의무적으로 봤다. 그런데 대학 들어가고 민용근 감독이 추천해준 마이크 리의 <네이키드>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걸 보고 나니 지겹게 봤던 <노스텔지어>가 다른 관점에서 보이더라. 정신이 번쩍 들더라. 그때부턴 취향을 찾아가는 단계로 돌아갔다.
-단편 <핵분열 가족> <마이티맨> <가족 같은 개, 개 같은 가족>은 동생과 함께 연출을 했다. =동생이 <귀여워> <인어공주> 제작부장이었다. 그때 내가 강우석필름아카데미(지금은 없어졌다)에 다녔는데, 35mm 단편영화를 무료로 찍을 수 있었다. 막상 영화를 찍으려니 현장경험이 너무 없었고, 그래서 동생과 함께하게 됐다. 형제지간이라 그런 협업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제작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각자 하고 싶은 부분이 달라지더라. 여기저기서 장편 제안이 들어오면서 그렇게 각자의 길을 찾아나서게 된 거다. 동생은 지금 IT쪽에서 어플 개발업무를 하고 있는데, 이번 영화의 어플도 발벗고 나서서 만들어줬다.
-<핵분열 가족>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영화제에서도 반응이 좋았다. 상업영화 데뷔 기회가 많았을 텐데 데뷔작은 그런 수순을 벗어나 있다. =물론 그땐 시장상황이 좋았으니, 좋은 조건으로 속편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다. 다른 독립영화들과 달리 단편이 확실히 코믹 색깔을 띠니까 제작자들 입장에선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난 규모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대중음악을 하더라도 자기 색깔로 끌고 가는 <퀸>처럼 나도 내 영화에 색깔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기대가 있었다. 마이너한 요소가 있더라도 승산이 있어 보였다.
-장르에 대한 뚜렷한 기호가 자신을 규정하는 장점이긴 하다. =사실 장르라는 말이 나에게는 애매모호하다. 익숙한 패턴을 편의적으로 만든 말이 장르가 아닐까. 긴장된 걸 찍으려다 보니 스릴러, 웃기게 찍으려다 보니 코미디가 되는 거다. 결국 감정이 먼저다. 난 떫고 씁쓸하다거나 달콤쌉쌀한 것같이 복합된 감정엔 미숙하다. 웃기거나, 슬프거나, 통쾌하거나 그렇게 단순명료한 감정, 대중적으로 접목이 가능한 감정에 파이팅할 수 있다. 그게 결국 내 작품의 특징인 것 같다. <베니와 준>을 보면서, ‘저 크레딧에 이름을 지우고 내 이름을 새겨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날 닮은 영화더라. 따뜻하고 감동적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 열심히 해서 영화를 잘 만들게 되면 <파고> 같은 영화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간극이 내게 존재한다.
-다음 작품은 그럼 <베니와 준>인가, <파고>인가. =하나는 미혼모 영아 살해를 다룬 공포영화인데, 그런 끔직한 일을 저지른 미혼모 입장에서 돌아보는 것. 또 하나는 두집 살림을 하는 형사가 결국 파국을 맞는데 본처가 아닌, 욕먹는 세컨드 입장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초고는 썼는데 갈 길은 아직 멀다. 너무 장르영화도 아니고 또 너무 마이너하지도 않은 영화. 내가 하려는 게 상업영화 틀 안에서 녹아야 할 숙제가 남는다.
-역시 다음 작품도 돌을 맞는 쪽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다. =어떤 아이가 부모를 죽였더라 하는 뉴스를 들으면 대개는 ‘세상 말세야’라고 하지만, 난 그렇게 매도하는 대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진다. 욕할 때 하더라도 이야기는 들어보자. 아이를 죽인 미혼모에게도, LPG통을 집어던진 노동자에게도 다들 사연은 있는 거 아닐까. 너는 어떻게 이용당했기에 여기까지 왔니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