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사물을 과도하게 사랑하거나 병적으로 혐오하는 특이한 체질을 가진 이들이 있다. 듣자하니 시저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역겨워했고, 폴 발레리는 비둘기가 구구거리는 소리를 혐오했다고 한다. 괴테는 손으로 편지 쓰는 데에 몸서리를 쳤고, 르네 마그리트는 기름 냄새에 경기를 일으켰다. 프리드리히 쉴러는 새가 날개를 푸덕거리는 소리를 극도로 싫어했지만, 이상하게도 썩은 사과의 냄새는 병적으로 좋아했다. 롤랑 바르트는 뚜렷한 이유 없이 바로크 음악을 극도로 혐오했고, 아도르노 역시 과도할 정도로 재즈 뮤직에 거의 본능적인 반감을 드러내곤 했다.
체액의 독특한 혼합
멀쩡한 것을 역겨워하고 역겨운 것을 선호하는 이 괴팍한 성벽을 가리키는 낱말이 존재한다. 종종 신체의 과민반응을 동반하는 이 괴상한 체질을, 예로부터 독일인들은 ‘이디오진크라지’(Idiosynkrasie)라 불러왔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개인성벽’이라 해야 할까? 아무튼 원래 그리스어 ‘이디오신크라시아’(διοσυνκρασα)에서 온 이 말을 글자 그대로 풀면, ‘자기만의 고유한’(διο)+‘혼’(συν)+‘합’(κρσι)이란 뜻이 된다. 이 개념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가령 세상의 모든 개체가 실은 4원소의 독특한 혼합이라는 이론을 생각해 보라.
이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 ‘이디오진크라지’는 아주 오랫동안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시켜주는 특질의 이름으로 사용되어왔다. 신체를 구성하는 원소의 조합이든, 아니면 기질을 구성하는 체액의 혼합이든, 이디오진크라지는 그 독특한 혼합의 결과로 생성된 개인을 가리켰던 것이다. 이 ‘혼합’을 더 역동적으로 파악하여, (다른 이들만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과도 구별되는 개체로 생성하는 끝없는 운동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선가 이 말은 오늘날과 비슷하게 알레르기 반응과 같은 비정상적(?) 체질을 가리키게 된다.
‘이디오진크라지’라는 용어는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된다. 의학에서 이 낱말은 특정한 대상, 약물, 혹은 요법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특이체질을 가리킨다. 심리학에서는 이 말로써 특정한 사물, 동물, 사람, 혹은 자극에 병적인 혐오나 선호를 보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사회심리학에서 이 말은 한 집단의 보편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개인의 독특한 행동방식을 가리키며, 언어학에서 그 말은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에서만 사용하는 독특한 어휘나 표현 방식을 가리킨다. 가령 나는 “…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는 바틀비의 독특한 어법을 생각해보라.
말미잘의 촉수처럼
니체는 지나가는 말 앞에 무릎을 꿇고 꺼이꺼이 울며 동물을 기계로 규정한 데카르트를 대신하여 사죄를 했다고 한다. 이거야말로 철학적 이디오진크라지의 전형이 아닐까? 하지만 정작 ‘이디오진크라지’라는 용어를 철학적 개념으로 만든 사람은 아도르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어떤 일반성에도 종속되지 않는 단독성(singularity)으로서 이디오진크라지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 그 사회가 행사하는 보편성의 폭력에 저항하는 유일한 양식이다. 그는 대중과의 소통(에 요구되는 보편적 코드)을 거부하는 현대예술의 난해함, 혹은 괴팍함에서 이디오진크라지를 본다.
현대미학의 범주로서 ‘이디오진크라지’는 아마도 ‘취미’(Geschmack)라는 근대미학의 범주의 반대명제일 게다. 칸트 역시 학적 판단과 다른 미적 판단의 독특성을 인정했다. ‘개념적’ 판단이 보편자 아래 개별자를 포섭시킨다면, ‘미감적’ 판단에서는 개별자 위에 보편자를 구성한다는 것. 하지만 아무리 개별자를 앞세워도 칸트는 미적 판단이 결국 모든 이의 보편적 동의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디오진크라지는 보편적 동의를 거부한다. 우리가 썩은 사과 냄새를 좋아하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대중이 현대예술(특히 현대음악)을 이해하기란 힘든 일이다.
미적 판단력이 문명화한 능력이라면, 이디오진크라지는 말미잘 촉수 같은 신체의 원초적 반응이다. 아도르노는 ‘진짜’와 ‘가짜’ 이디오진크라지를 구별한다. ‘진짜’는 자연을 미메시스한 것으로, 그 어떤 이성적-개념적 판단에 앞서 즉각적-본능적으로 환경에 적절히 반응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가령 괴팍할 정도로 난해한 현대예술은 세계의 부정적 상태에 대한 본능적으로 적절한 반응이다. 반면, 나치의 유대인 혐오증은 ‘가짜’, 즉 원래 이념적 혐오에 불과한 것을 마치 본능적 반응처럼 표출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 구별이 과연 그렇게 명확한 것일까?
가령 나치도 재즈를 혐오했고, 아도르노도 재즈를 혐오했다. 전자는 ‘가짜’, 즉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고, 후자는 ‘진짜’, 즉 타고난 음악적 감성의 본능적 반응일까? 아도르노의 혐오감도 혹시 특유의 엘리트주의 미학과 자본주의적 획일성에 저항한다는 정치적 제스처에서 나온 이념적 반응인지 모른다. 이 대목에서 하버마스는 슬쩍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을 도입한다. ‘진짜 이디오진크라지는 사후 정당화를 통해 보편적 동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이 경우 ‘이디오진크라지’는 사실상 칸트가 말하는 ‘취미’와 다를 바 없어져 고유의 매력을 잃을 것이다.
개념의 이디오진크라지
이런 논리적 난점에 신경을 안 쓰는 게 프랑스의 철학의 특징. 가령 들뢰즈는 이디오진크라지의 개념을 더욱 급진화한다. 아도르노는 ‘이디오진크라지’를 주로 예술에 적용했다. 철학은 보편자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개별자’이기에 진리를 가지나 스스로 말할 수 없고, 철학은 ‘보편자’(=개념)이기에 진리를 말하나 스스로 가질 수는 없다. 그리하여 개별과 보편, 예술과 철학은 상보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아도르노가 보편자의 영역에 놓은 철학에 ‘이디오진크라지’를 적용한다. 철학적 개념이야말로 이디오진크라지를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의 임무는 개념을 발명하는 데에 있다. 그는 개념을 소설의 주인공에 비유한다. 위대한 소설의 주인공처럼 철학자의 개념들 역시 독창적이고 개성적이어야 한다.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햄릿’,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멜빌의 ‘바틀비’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 소설가의 주인공들이 하나의 인격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개념이라는 점이다. 철학자들 역시 종종 자신들의 개념을 일종의 개념인격(personnages conceptuels)으로 제시하곤 한다. 가령 플라톤의 ‘소크라테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생각해보라.
물론 개념인격이 반드시 고유명사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개념인격은 고유명사로 표기되지 않는다. 가령 헤겔의 ‘절대정신’, 하이데거의 ‘존재’,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생각해보라. 이들 개념인격은 물론 철학자의 별명이나, 그것들이 철학자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거꾸로 철학자야말로 개념인격의 전개라고 한다. 철학의 진정한 주체는 철학자가 아니라 이들 개념인격이다. 철학은 더이상 세계에 대한 최종해석을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개념인격을 통해 우리의 눈을 “재미있는 것”, “중요한 것”, “주목할 만한 것”에 돌려놓을 뿐이다.
아도르노가 예술에 걸었던 기대를, 들뢰즈는 그대로 철학에 옮겨놓는다. 아도르노에게서 예술이 그러했듯이, 들뢰즈의 개념인격 역시 이디오진크라지, 즉 독창적이고 일회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제 <철학이란 무엇이나?>에 나오는 그 유명한 구절이 이해가 될 것이다. “철학자는 자기의 개념인격의 이디오진크라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