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작업도 마치고 이사도 마치고 당연스레 ‘어디론가 떠나고파’ 병에 걸린 나는 평소와 조금 다른 증상을 느꼈다. 보통은 ‘떠나고파! 그렇다면 떠나라!’의 패턴이었는데 이번엔 희한하게도 다른 패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첫 번째는 ‘이사하느라 쓴 돈도 많은데 무슨 여행이야’라는 평소 나답지 않은 어른스럽고 대견한 패턴, 두 번째는 ‘아휴, 좋은 데 가봐야 멋지다 싶은 것도 한순간이지 어차피 호텔 방 침대에만 누워 있을 거 아냐’라는 어른스럽고도 지친 패턴. 결과만 말하자면 괴물이 되어버린 피부를 되돌리러 지난번 원고에 쓴 대로 온천여행을 다녀오긴 했는데 역시 목적의식이 있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고 일인지라 마음속에는 여전히 ‘어디론가’, ‘여유’, ‘휴식’, ‘풍경’ 이런 키워드가 몽글거리고 있었다. 이도저도 못하고 ‘아 간결하고 아늑한 호텔 방에서 뒹굴고 싶다, 하지만 돈은 아까워’를 반복하던 나에게 갑자기 다가온 한 줄기 깨달음. ‘집을 호텔처럼 꾸미면 되지 않는가’, 두둥. 세상 사람 모두 알고 있었던 것 나만 몰랐나. 그렇다! 집을 휴식의 공간으로 꾸미면 되는 것이다! 유레카! 이렇게 나의 긴 모험이 시작되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그렇듯 1년이나 2년에 한번씩 이사를 다니고, 그래서 이사하기에 불편한 큰 가구는 좀처럼 사지 않고, 이건 개인적 성향일 테지만 공간에 큰 애착이 없어 예쁘게 꾸미는 것도 도통 관심이 없고, 직업 특성상 한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전력질주하다가 그 다음에는 녹초가 되어 누워 있기만 하는 패턴이라(아, 그런데 이 또한 개인적 성향일지도 모르겠다) 집은 그냥 지쳐 쓰러져 잤다가 허겁지겁 나가는 공간일 뿐이었다. 이러던 내가 유레카 한번에 환골탈태해서 하루종일 쓸고 닦는 사람이 될 리는 없고…. 일단 ‘절대휴식의 침실’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침대와 작은 책상 외엔 아무것도 없는 방을 목표로 첫 번째 스테이지 ‘매트리스’에 접어들었다.
침구세트 가격도 종류도 천차만별
지금까지 쓰던 싱글침대는 가운데가 슬슬 꺼져 자고 일어나면 가끔 허리가 아팠다. 그래, 이젠 나도 좀 좋은 침대에서 자볼까봐. 난 몸이 재산이잖아(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몸이 재산이지만). 포켓 스프링으로 유명한 그 회사 제품을 검색해보니 와우, 장난이 아니었다. 그 회사의 가장 약체 매트리스가 홋카이도를 저렴하게 4박5일 다녀올 정도의 가격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다녀온 셈치고 살 수도 있지만 으… 나는 아직은 그 돈이면 홋카이도 가는 게 더 좋아. 단번에 그런 레벨 높은 아이템을 얻을 수는 없었고 내 레벨에 맞는 아이템은 대체 뭘까 하며 떠돌게 된 침대의 던전은 참 넓고도 넓었다. 포켓 스프링의 너머에는 라텍스 포켓 스프링이 있었고, 그 라텍스도 천연과 인조로 나뉘었다. 천연 라텍스도 완전 천연이냐 합성이냐에 따라 확 달라지고, 완전 천연도 제조국에 따라 또 등급이 달라졌다. 나는 전혀 모르던 사실들을 인터넷의 주부님들은 너무 잘 알고 계셨다. 그들은 내가 아직 모르는 세계의 진리와 비밀을 알고 있었다!
다음은 이불이었다. 이제까지는 그냥 인터넷에서 산 저렴한 이불을 쓰고 있었는데 빨래도 쉽고 관리도 편하고 따뜻해서 별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호텔 방을 목표로 하는 침실이라면 고급스러운 원단의 시트와 베개, 이불이 통일된 톤으로 좍 깔려 있고, 머리를 뉘이면 풍성한 베개가 날 감싸주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가볍고도 따스한 이불은 내가 뒤척일 때마다 기분 좋은 바스락 소리를 내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뭘로 검색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더듬더듬 호텔 한 글자 띄고 이불로 검색하니 나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그런 종류의 이불은 어디서 사냐는 질문글이 있었다. 돕고 사는 세상. 결국 그 가벼운 바스락의 정체는 ‘거위털 이불’이었고, 그것은 사실 속통이며, 그 속통을 감싸는 커버를 따로 사야 하는데, 그 커버의 왕은 이집트산 120수 면으로 만든 것이고, 그 숫자가 올라갈수록 감촉이 좋으며… 아, 이 던전도 보통이 아니겠구나. 도통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일단 그래 거위털 속통 어쩌고부터 얼마인지 보자 하고 눌러보니 뜨악, 아주머니 운 좋게 세일할 때 사셨다는 가격이 홋카이도 3박4일 가격이었다. 그리고 거위도 아무 거위나 잡아서 만드는 건 안 쳐주고 헝가리산 거위의 가슴털이 왔다라고…(농담 아님). 그래 거위털만 털이냐. 오리도 있고 양도 있다. 극세사도 있고 전통의 목화솜도 있다. 심지어 신소재 신슐레이트라는 것도 있더라. 뭐? 인슐린?
해결보지 못한 채 일단 탈출. 다음 스테이지인 커버의 세계로 왔다. 그러니까 내가 사야 하는 것은 밑에 깔 시트와 이불 커버와 베개 커버 세트인데 이럴 땐 아마존 검색창에 ‘duvet’라 넣어야 한단 사실을 한참의 검색 끝에 알아냈다. 하지만 디자인이 전부 아메리칸 느끼해서 그 검색어 발견의 노고는 치하받지 못하고 창을 닫아야 했다. 생활소품을 주로 파는 한국 사이트를 열어보니 요즘 수많은 옷 쇼핑몰들이 그러하듯 커버에도 예쁜 이름이 붙어 있었다. 크림연유, 요코블루, 스노캔디… 여긴 코리안 메르헨인가. 그런데 그 이름이나 색상, 무늬는 커버의 세계에서 결코 주인공이 아니었고 내 앞에는 금세 원단의 방대한 퍼즐이 펼쳐졌다. 그 이름들도 찬란하게 트윌, 아사, 거즈, 자카드, 실크, 옥스퍼드, 극세사, 텐셀, 광목, 리넨… 그리고 호텔 침대의 그런 원단은 관리가 힘들어서 에쿠니 가오리 소설 주인공처럼 매일 다림질하지 않는 한 유지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 같은 애는 하루 자고 일어나면 슬럼이겠네.
오, 살림의 여왕들이시여
그렇게 검색을 하다 새로 알게 된 인터넷의 커뮤니티들. 나도 웹서핑한다면 좀 하는 사람인데 이번에 발들인 곳들은 정말 신세계였다. 저 위의 아이템 외에도 수많은 마법의 아이템이 있었다. 어떤 프랑스제 무쇠냄비에 김치찌개를 끓이면 똑같은 재료를 써도 그 맛이 마치 가마솥에서 요리를 한 듯 다르다고 하고, 어떤 독일제 스팀청소기로 청소를 하면 집을 통째로 삶은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비밀의 언어도 있었는데, ‘예신’은 ‘예비신부’의 줄임말임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고, 예신들이 혼수의 리스트와 가격을 적나라하게 주고받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그런 예신들이 존경하는 선배들이 모여 있는 공간 또한 있었는데 이곳 자유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글 하나하나가 주말드라마 뺨을 석대는 치겠더라. 놀라운 마법 아이템들과 엄청난 사연들에 나는 어느새 침대나 이불은 까맣게 잊고 어쩜 좋아… 하며 클릭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침대 하나를 사는데 누군가가 얼마나 고민을 하고 질문을 하고 알아보고 발품을 파는지 같이 사는 가족들은 아마 절대로 모를 것이다. 아토피에 고생하는 아이를 위해 이불 속통을 얼마나 고심해서 정하는지, 얼마나 열심히 관리하는지 아마 아이는 전혀 모를 것이다. 나도 몰랐으니까. 결국 난 꽤 근사한 침실을 만들었다. 가난한 독신자의 친구, 스웨덴의 은총인 모 회사에서 만든 침대 프레임에 유명하진 않지만 튼튼한 매트리스를 놓았고 거위털은 아니지만 비슷하다는 모 할인점의 극세사 속통에 마음에 쏙 드는 체크무늬의 정갈한 커버를 끼웠다. 지나가다 만져본 고급 거위털 이불은 정말 끝내줬지만 난 지금 내 침실에 매우 만족한다. 이렇게 나는 ‘살림이라는 거대한 대륙’에 떨리는 첫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