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이후 포토저널리즘에는 피사체에 냉정하게 거리를 취하는 사진들이 나타난다. 피사체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는 바람에 의미가 흩어져 쓸모없어진 이 사진들은 저널리즘의 밖으로 나와 '예술'이 된다. 데드팬 역시 세계에 대해 정치적,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 게 난폭하게, 구차하게, 혹은 역겹게 느껴지는 시대의 사진적 증언이리라.
몇년 전 천안의 한 갤러리에서 접한 토마스 루프의 초상사진들. 짓궂게 표현하자면, 일반인의 여권 사진을 대형포맷으로 확대해 미술관 벽에 걸어 놓은 모양이었다. 인물들의 무표정한 얼굴도 차가웠지만, 애초에 대형포맷으로 찍은 사진이라 너무 날카롭고 선명한 나머지 보는 이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듯했다. 이 독특한 효과, 그 극도의 썰렁함을 '데드팬'(dead pan)이라 부른다는 것, 그리고 이게 그만의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데드팬'은 오늘날 출판이나 전시의 맥락에서 수용되는 사진의 주도적 양식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수사법으로서 데드팬
‘팬'(pan)은 얼굴을 가리키는 미국의 속어. 결국 '데드팬'은 '무표정한 얼굴'이라는 뜻이다. <위키피디아>는 데드팬을 "표정이나 동작의 변화없이 유머를 제시하는 코믹한 전달의 한 방식", 즉 "단조롭거나, 장엄하거나, 구역질나거나, 혹은 무관심한 투로 농담을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가령 영화 <록키>의 주인공은 좋아하는 여인의 가게에 들려 매일 하나씩 농담을 들려준다. 하지만 록키 자신이 워낙 무뚝뚝한 성격이라 웃음을 잃은 여인을 웃기려는 그의 시도는 늘 썰렁함만 남긴 채 끝난다. 이 대목에서 농담을 하는 록키의 그 무표정은 데드팬의 전형일 게다.
코미디의 한 장르를 가리키던 이 말이 최근엔 사진의 양식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일체의 판단과 감정을 배제한 채 피사체와 거리를 유지하는 냉정한 사진의 전통은 멀리 1920년대의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일은 1차대전 직후의 혼란에서 벗어나 잠깐 동안 안정과 풍요를 구가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예술도 요란하게 주관성을 표출하는 표현주의에서 벗어나 피사체에 심리적 거리를 취하는 냉정한 객관적 양식으로 나아갔다. 오늘날 데드팬의 효시로 여겨지는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은 이런 분위기에서 나왔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전통을 현대에 이은 것은 이른바 '슈투트가르트파'의 창시자인 베른트와 힐라 베혀 부부(夫婦)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토마스 루프는 이들에게서 사진을 배웠다고 한다. 잔더-베혀-루프로 이어지는 이 강력한 전통 때문에 오늘날 '데드팬'은 거의 독일 현대사진의 대명사로 여겨지나, 독일에 데드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데드팬이 독일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가령 데드팬의 미학은 안드레아스 거스키, 로버트 스미슨, 루이스 발츠는 물론이고, 솔 르윗과 같은 미니멀리스트, 에드 루샤와 같은 팝 아티스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세계감정으로서 데드팬
중요한 것은, '왜 그토록 많은 작가들이 오늘날 그 썰렁한(?) 사진에 열광하느냐' 하는 것이다. 인터넷에 들어갔더니 데드팬 열풍에 식상한 어느 작가의 푸념이 들린다. "우씨, 모델이 '치~즈'라고 하지 못하게 하고 찍으면 무조건 좋은 사진이 되는 거냐?" 사실 데드팬이 현대 예술사진의 대표적 주자가 된 까닭을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예술의 요체는 작가의 표현에 있으나, 데드팬은 작가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한다. 아무 제재나 골라 판단과 감정을 배제한 채 그저 정밀하게 찍은 기계적 사진이 어떻게 '예술'(사진)이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작가의 주관적 개입을 배제한다고 예술이 못 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앤디 워홀을 보라. 그는 작가의 솜씨를 배제한 채 되도록 작품을 기계적 복제에 가깝게 만들려 했다. 그는 일부러 작가성(authorship)을 부정했으나, 외려 그 점에 그의 천재성이 빛난다. 물론 인쇄물에 가까운 그의 작품에서 작가의 성격, 감정, 생각을 읽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워홀의 작품이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워홀의 작품은 이른바 '시뮬라크르'의 시대, 즉 복제가 자립하여 원본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시대의 예술적 증언이었다.
데드팬은 초상이나 풍경에만 있는 게 아니다. 포토저널리즘에도 비슷한 경향이 존재한다. 80년대 이후 포토저널리즘에는 피사체에 냉정하게 거리를 취하는 사진들이 나타난다. 피사체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는 바람에 의미가 흩어져 쓸모없어진 이 사진들은 저널리즘의 밖으로 나와 '예술'이 된다. '신 포토저널리즘'(New Photojournalism)이라 불리는 이 경향은 모던의 도덕적 강박과 정치적 위선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반발이었다. 데드팬 역시 세계에 대해 정치적,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 게 난폭하게, 구차하게, 혹은 역겹게 느껴지는 시대의 사진적 증언이리라.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데드팬의 독특한 느낌, 그 황량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설명할 수가 없다. 데드팬에 대한 여러 해석 중에서 본질을 짚은 것은 하이데거의 철학을 동원한 설명으로 보인다. 피사체 앞에서 감성적, 이성적, 윤리적 판단을 배제하는 것은 자연스레 훗설이 말한 '판단중지'(epoch?)로 이어진다. 훗설은 판단중지를 통해 '사상 자체로'(zur Sache selbst), 즉 우리의 지각 속에서 아직 자아/세계, 주관/객관이 구별되지 않는 상태로 돌아가려 했다. 데드팬의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모든 판단이 존재하기 이전의 이 원초적 상태가 아닐까?
근대철학은 주체/객체의 구분에서 출발하나, 하이데거는 스승의 뒤를 이어 아직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이루어지기 전의 지점에서 출발한다. 근대철학은 인간을 세계 밖에 놓았지만, 그는 인간을 '세계 안의 존재'(in-der-Welt-Sein)로 본다. 세계라는 자기장, 그 복잡한 관계와 연관의 망 속에 처해 있기에, 인간은 '현존재'(Dasein)라 불린다. 현존재가 '주체'가 되고, 세계가 '객체'로 전락하는 것은 추상을 통해 나중에 이루어지는 일. 주체가 되어 객체로 전락한 세계와 '인식론적' 관계를 맺기 전에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이미 세계 속에 '처해 있다'(Befindlichkeit)고 한다.
이 맥락에서 흥미로운 것은, 주체가 객체와 인식의 관계를 맺기 전에 세계는 먼저 현존재에게 '기분'(Stimmung)을 통해 알려진다는 대목이다. '기분'이란 것은 물론 근대 인식론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휘다. 예를 들어 산속에서 길을 잃고 으슥한 숲 속에 들어간다 하자. 그곳이 어딘지도, 거기에 뭐가 있을지 몰라도, 그곳의 분위기가 어떤지는 '기분'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렇게 현존재는 기분을 통해 자신을 세계에 개방한다. 일체의 판단을 중지한 데드팬 사진의 스산함은 주객분리에 앞서 현존재가 세계 속에서 느끼는 이 원초적 기분인지도 모른다.
운하임리히
일상에서 사물을 접할 때 우리는 '동물', '식물', '생물', '기계' 등 교육을 통해 습득한 다양한 범주를 통해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편안함(at home)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범주들을 무장해제 당한 상태에서 그것을 접할 경우, 사물은 어떤 막연한 느낌이나 기분으로 다가올 게다. 그때 우리는 불현듯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가 서 있는 바탕을, 우리가 거기서 출발했으나 오래 전에 잊어버린 근원을, 이른바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를 보게 된다. 일상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경우, 우리는 그것을 불안하게(unheimlich=not at home) 느낄 것이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대개 그 안에 피사체의 정체를 지시하는 코드(범주)를 집어넣기 마련이다. 하지만 데드팬은 그런 코드를 배제함으로써 우리를 불현듯 세계와 현존재 사이의 원초적 상태로 되돌린다. 데드팬 사진이 내뿜는 불편하게 스산한 분위기는 거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