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솔직했고, 진지했으며, 유쾌했다.
고현정(39)과의 인터뷰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훌쩍 지나갔고, 그가 쏟아낸 말들은 취재수첩 20페이지를 꽉 채웠다.
지난해 MBC TV '선덕여왕'에서 신라시대 여성 정치가 '미실'로 안방극장을 장악했던 고현정이 올해는 SBS TV '대물'에서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 서혜림으로 분해 '고현정 표 카리스마'를 잇달아 과시하고 있다. 때로는 지축을 흔들 정도로 토해내고, 때로는 꾹꾹 눌러 삭히는 다채로우면서도 섬세한 감정연기는 '신들렸다'를 평가를 낳고 있다.
지난 9일 경기 고양 탄현 SBS 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났다. 전날 방송에서 대권 도전을 선언한 서혜림이 단정한 치마 정장 차림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촬영 중간에 문제가 많아 혼란이 좀 있었고 화도 좀 났지만 어찌됐든 시청률 25%를 넘어서며 수목극 1위로 사랑을 받고 있는데 끝까지 잘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쉬움이 좀 남긴 하지만 아직 4회가 남았고 제작진 모두 최선을 다하자는 분위기예요. 사실 제가 욱하는 게 있어서 문제를 삼으려고도 했어요. 그런데 빈말이 아니라 새로 오신 감독님과 스태프가 최고의 분들이라 생각을 바꿨습니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스태프의 기운을 빠지게 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지금은 저희 모두 시청자의 사랑을 고마워하며 좋은 분위기 속에서 촬영 잘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초반 작가와 PD 교체로 홍역을 치렀던 상황을 그는 선수치듯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런 말도 했다.
"초반에는 저 혼자서 극을 끌고 가려는 오만함이 있었어요. 그런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그런 짐을 서로 나뉘게 됐고 '이래도 좋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됐어요."
다음은 고현정과 일문일답
--한국 최초 여성 대통령 이야기가 부담되지는 않았나.
▲정치 드라마들이 과거 이야기를 할 때는 수작들이 많았지만,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는 없었기 때문에 기대가 됐다. 나름의 각오도 있었고 내가 잘만하면 현실성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시청자께 시원함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현실 정치에 대비해 정치권에서 말들이 많았다. 특정인을 미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고.
▲어찌 됐든 관심이니 기분 좋았다. 누군가를 미화한다는 소리도 현재 눈에 띄는 여성 지도자 몇 분이 계시니 나오는 것 아니겠나. 아예 비교 대상이 없었다면 우리 드라마가 더욱더 말이 안됐을 텐데 허구의 드라마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개연성이 있다는 얘기 같아 좋았다.
--실제 정치에는 얼마나 관심이 있나.
▲전체를 100으로 치면 한 30 정도?(웃음) 아무리 연기라지만 100분의 1도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하려니 힘들다. 악수도 몇 번 해봤는데 보통 일이 아니더라.(웃음)
--서혜림 같은 인물이 실제로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대물'은 어쩔 수 없는 판타지다.
▲개인적인 바람은 서혜림 같은 인물이 어떤 큰 인물의 오른팔, 왼팔, 오른다리, 왼다리가 되는 것이다. 서혜림이 올곧기는 하지만 그 인물의 크기로는 우리나라 대통령을 하기엔 좀 위험하다.(웃음) 대신 서혜림 같은 인물을 아우를 진짜 지도자가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드라마 방영 도중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삼호드림호 피랍과 석방 등의 뉴스가 있었다. 서혜림이라면 그런 일들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선원 10명과 장관 1명이 같이 피랍됐다면 선원들을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 것처럼 어떤 일에서든 원칙이 있고 그것을 따라야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없다면 장관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마찬가지로 정상인과 장애인 둘 중 하나를 구해야 한다면 당연히 장애인을 구해야 하는 것은 내가 이상주의자라서가 아니라 그것은 고민할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고민할 사항이 아닌데 고민을 하며 시간을 허비해 안타까움을 주는 경우들이 있는 것 같다.
--현실 세계에서도 촬영 환경 개선 등에 관해 목소리를 종종 낸다. 실제로 리더십이 있거나 어떤 일에 앞장서는 경향이 있나.
▲(그는 손사래를 치며 하하 웃었다) 어려서부터 키가 크고 몸이 약해서 늘 혼자 있는 아이였기 때문에 그런 성격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역이 맡겨지면 연기로서는 제대로 소화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현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내 출연료를 올려달라는 것이 아니다. 화장실이 깨끗해서 싫어할 사람 없을 것 같고, 수돗물이 안 나오는데 나오게 해달라고 해서 불편해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내가 좀 욕을 먹더라도 촬영장이 청결하지 못한 것은 못 참겠다. 간혹 나 하나만 잘 해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제작진이 있는데 난 럭비공 같은 아이라 불쑥불쑥 현장 여기저기를 다녀보고 안 좋은 점들을 지적한다. 이제는 좀 그래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현정이야말로 진정한 '연예계의 대물'이라는 말이 나온다. 미실에 이어 서혜림으로 신들린 연기를 펼치고 있다.
▲(그는 민망한듯 어쩔 줄 몰라하며 한동안 웃었다) 감사하다. 컴백한 지 6년인데 이제 몸이 풀릴 때도 되지 않았을까.(그는 2005년 1월 SBS '봄날'로 1995년 SBS '모래시계' 이후 10년 만에 복귀했다) 다행히 미실도, 서혜림도 좋은 역할이라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 역할이 좋은 게 60-70%를 차지한다. 특히 미실은 너무 좋았고 지금도 그 여자가 보고 싶다. 서혜림은 애증이 많이 남는, 숙제도 많이 남기는 캐릭터가 될 것 같다. 좀더 시간이 있었으면 썩 더 괜찮은 인물이 나왔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많다. 하지만 대본을 보면서 충분히 공감가는 장면들이 있으니 후회없게 하려고 노력했다. '신들린 연기'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많이 알려진, 많이 소모된 감정 연기는 피하자는 생각으로 한다. 배우들끼리는 '남이 안한 감정연기 하네?'라는 말들을 한다. 울음도 TV에서 많이 나온 울음은 웬만하면 안하려고 한다. 슬픔이 정점에 올랐을 때는 다 같지만 그 시작과 끝은 다 다르다. 그 지점을 포착해 나만의 감정을 표현하려고 한다.
--치열하게 연기 고민을 할텐데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또 연기를 안 했으면 어쩔 뻔했을까 하는 생각은 안 하나.
▲연기를 안 해도 어디서든 뭔가를 하며 잘 살았을 거다.(웃음) 스트레스는..평소에 진짜 잘 웃는다. 사춘기가 이제야 온듯 웃기는 일이 참 많고 실없다 느껴질 정도로 잘 웃는다. 쉴 때는 그냥 집에 있는다. 충전하듯이 사람도 안 만나고 쉰다. 구체적으로는 집 목욕탕에 물 받아놓고 들어가 많은 시간을 보낸다. 공상을 많이 하고 TV도 많이 본다. 연기를 통해서도 에너지 소비만 하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신명을 느낀다. 몸은 힘들어도 연기를 통해 에너지를 얻고는 한다.
--대인관계 폭이 의외로 넓다. 까칠하고 도도할 것 같은데 주위 사람들은 다 유머러스하고 장난기도 많다고 말한다.
▲까칠한 거 맞다. '언제 밥 먹자'라고 말만 하는 사람 싫어한다. 그런 말을 하면 꼭 먹어야한다. 많은 사람을 만나지는 않지만 한번 본 사람은 계속 본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칭찬하지 않는 것도 싫어한다. 아무래도 연예인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우리끼리라도 솔직하게 이야기하자고 말한다. 연예인들이 '팬이에요'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도 싫어한다. '구체적으로 뭐가 좋았는데?'라고 꼭 되묻는다. 난 내가 아는 사람이 나오는 거면 케이블 프로그램이라도 다 찾아보고 구체적으로 평을 하고 관심을 보인다. 그러다보니 내가 좀 까칠한 표현을 써도 어느 정도 좋게 들어주는 것 같다. 말을 세게 하는 것 같지만 친한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안다. 그리고 남에게 쓴소리 하는 것도 은근히 중독이 된다.(웃음) 내가 그러다보니 내 주변에도 완전히 까칠한 사람들뿐이다. '대물'에 대해서도 하도 쓴소리를 해서 내가 '대물'을 변호하느라 바쁘다. 하하.
--원래 그렇게 거침이 없나. 무척 솔직하다.
▲정직하려고 한다. 어렸을 때는 내 생각을 절대로 안 나타내려고 몸을 사리는 편이었다. 그런데 뭐..나름 '일'들을 겪으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이번 생에서 푸는 것은 힘드니 될 수 있으면 더는 스트레스는 받지 말자고 결심했다. 많은 이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난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푸는 훈련은 안 돼 있지 않나. 그러다 보니 차라리 내 기분이 좋아서 주위 사람들도 즐거워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간혹 '버럭' 하는 것은 정말 참다가 그러는 것이다.
--공식석상에서 농담도 잘한다. 처음에는 많은 이들이 당황했지만 이제는 고현정식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즐겁게 소비한다.
▲연예인이 너무 바람직해도 재미있지 않더라. 어느 한에서는 울퉁불퉁한 것도 괜찮은 것 같다. 너무 매끄러우면 오히려 다른 것을 보게 되더라. 중간 중간 해프닝도 좀 있어야 재미있지 않나. 물론 나도 제작발표회 같은 데서 매끄럽게, 판에 박힌 얘기만 하며 안전하게 갈 수 있지만 그게 과연 대중에 대한 배려, 혹은 대접일까. 외줄타기인 듯하지만 위험수위만 잘 조절하면 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평상시에 잘살아야겠지. 그래야 내가 좀 까불어도 여러분이 이해해주시는 것 아니겠나.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마흔살이 되네요"라며 웃었다.
prett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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