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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인형의 노래

기계의 철학와 윤리적 두려움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에는 인상적인 노래가 등장한다. 원제는 ‘생울타리 속의 새들’, 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올림피아가 자동인형이라서 흔히 ‘인형의 노래’라 불린다.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무대 위에서 자동인형과 똑같은 동작과 손짓을 해야 한다. ‘로봇 춤’의 원조라고나 할까? 올림피아는 한참 노래를 부르다가 중간에 맥이 풀린 듯 갑자기 멈춰 선다. 이때 (오페라에서라면) 다른 연기자가, 혹은 (콘서트에서라면) 반주자나 지휘자가 올림피아의 등에 다시 태엽을 감아주는 시늉을 하면, 자동인형은 새로운 동력을 얻어 그 힘으로 노래를 마저 마무리짓는다.

기계 속의 귀신

‘인간-기계’(l’homme machine)의 발상은 멀리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합리주의 철학의 창시자는 인간의 신체를 기계에 비유한 바 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작동하는 시계와 고장난 시계의 차이와 같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인간을 곧 기계와 등치했던 것은 아니다. 기계와 같은 것은 인간의 신체일 뿐, 정작 인간성의 요체는 ‘정신’ 혹은 ‘영혼’에 깃들어 있다. 따라서 정신이 없어 자동인형이나 다름없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동인형일 수 없다는 것. 결국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기계 속에 깃든 영혼, 한마디로 ‘기계 집 속의 귀신’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본격적인 ‘인간-기계’의 관념에 도달하게 된다. 라 메트리는 ‘영혼’이니 ‘정신’과 같은 의심스러운 개념을 들여오는 데카르트의 과학적 불철저함을 비판하며, 인간에 대해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정의를 제안한다. 정신의 활동은 신체의 생리작용으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있으며, 신체의 작동 원리는 기계와 동일하다. 한 마디로 신체와 정신을 합한 인간 자체가 하나의 기계라는 얘기다. 물론 인간을 기계로 설명하는 데에는 난점이 따르긴 했던 모양이다. “인간은 너무 복잡한 기계여서, 그 기계에 대한 명확한 관념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기계라는 생뚱한 관념은 당시의 에피스테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생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과학적 패러다임은 물리학과 기계론이었다. 기계와 생명을 동일시하는 이 관념의 한계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데카르트가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에게 ‘신체의 작동이 기계와 같다’고 하자, 그녀는 시계를 가리키며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보세요. 저게 애를 낳을 수 있는지.” 아마도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제기할 수 있었던 반론이리라. 폰 노이만이 ‘자기 복제하는 기계’를 구상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유기체와 무기물

<미학강의>에서 헤겔은 생명체들 사이에 위계를 세운다. 나무는 가지를 꺾어도 새로운 가지가 자라난다.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가 유기적이지 않아서란다. 반면 동물의 경우 절단된 신체 부위는 다시 자라나지 않는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유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식물은 동물보다 열등한 존재다. 물론 잘린 꼬리가 다시 자라나는 도마뱀 같은 놈은 동물 중에서 열등한 축에 속한다. 오늘날 우리 귀에는 우습게 들리지만, 사실 서구의 형이상학은 오랫동안 이 유기체의 모델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모델은 물론 다른 영역에 설명의 패러다임으로 전용되곤 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예술작품을 유기체에 비유한다. 서사시 안의 에피소드들은 플롯의 진행에 기여해야 하며, 전체와 관련이 없는 세부들은 삭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이 유기체적 예술의 관념에 전복이 일어난다. 피카소나 브라크의 작품은 파편적 요소들의 기계적 결합, 이른바 몽타주다. 연극과 달리 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영상들의 몽타주로 이루어진다. ‘몽타주’라는 말이 공장에서 부품을 조립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때, 현대예술이 몽타주로 변한 것은 예술의 관념이 유기체에서 기계의 모델로 이행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자신의 논문 <인간-기계>(1748)에서 라 메트리는 재미있는 사례를 소개한다. ‘신체에서 분리된 근육을 자극하면 움직인다.’ ‘개구리의 심장은 신체에서 떼어내도 한 시간 동안 박동한다.’ ‘머리를 자른 닭도 한동안 뛰어다닌다.’ 이 모든 사례는 물론 (헤겔이 대표적으로 보여준) 유기체 모델을 반박하기 위함이리라. 신체 부위가 전체와 떨어져도 한동안 작동한다면, 동물의 신체 역시 실은 기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환자의 장기를 인공 장기나 타인의 장기로 대체할 때 사실 우리는 (마치 부품 교환하듯이) 신체를 기계처럼 다루고 있다.

돌아온 기계론

이 17, 18세기의 기계론이 부활한 것일까?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영역에서 기계론을 도입하고 있다. 촘스키는 유한수의 문장에서 무한수의 문장을 만들어내는 ‘언어기계’(변형생성문법)를 구상했다. 사회학에서는 도시를 종종 거대한 ‘사회기계’(social machine)로 간주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욕망기계’(desiring machine)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공생명에서는 이른바 ‘세포기계’(cellular automaton)를 사용한다. 컴퓨터 공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추상기계’(abstract machine)를 사용해왔다. 한마디로 데카르트가 기계가 아니라고 했던 정신마저 이제 기계로 모델링하게 된 것이다.

움베르토 만투라나와 프란치스코 바렐라는 기계를 ‘자기생성하고, 자기생산하며, 구성요소를 항상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생명체, 가령 세포는 자기생성(autopoiesis)하는 기계가 될 것이다. 바렐라는 기술적 기계의 특성을 타자생성(allopoiesis)으로 규정한다. 가령 자동차 조립공장은 모든 재료를 자기 바깥에서 들여오지 않던가. 펠릭스 가타리는 자기생성과 타자생성을 대립시키는 대신에 그 둘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배치를 생각한다. 기계를 타자생성의 범주에 넣었던 바렐라와 달리, 그는 기계를 자아생성과 타자생성의 결합체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이로써 기계와 생명을 가르는 장벽은 무너지고, 기계는 일종의 의사생명체로 간주된다. 가타리에 따르면 생물처럼 기계도 개체발생과 계통발생을 한다. 그 기계를 낳은 계획, 구성, 설계, 지식 등이 개체발생의 요소라면, 그것의 앞서 존재한 기계와 그 뒤에 등장할 기계의 연결은 계통발생의 측면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기계에도 유한성이, 말하자면 탄생과 죽음의 질서가 있다. 기계는 자기생성을 하면서 동시에 인터페이스를 통해 바깥과 교섭하며 타자생성을 하는 체계다. 펠릭스는 기계의 이 원생물학적(proto-biological) 성격에 원주체성(proto-subjectivity)을 부여한다.

철저한 유물론의 섬뜩함

이로써 존재와 대상을 가르던 장벽은 무너진다. 범기계론(pan mechanism)이라 할까? 세계는 이제 작은 기계들이 접속하여 더 큰 기계를 이루는 프랙털의 우주로 간주된다. 인간은 우주라는 기계의 관계망 속의 한 지절일 뿐이다. 인간-기계는 더이상 은유가 아니다. 어차피 사이버네틱스에서는 생명을 자동제어기계로 보지 않던가. 인간 역시 우주를 이루는 다른 기계처럼 자기생성을 하면서 동시에 타자생성을 하는 존재다. 이제 목적론은 기계론에, ‘유기체의 형이상학’은 ‘기계의 형이상학’에 자리를 내주고, 형이상학은 여기서 뒤늦게 현대의 수준에 도달한다.

끊임없이 자기와 타자를 창조하는 기계를 바라보는 미학적 즐거움에는 당연히 윤리적 두려움이 따라다닌다. 기계를 생명으로 보는 것은 곧 생명을 기계로 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원래 철저한 유물론에는 섬뜩함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느낌은 자동인형 올림피아를 보는 으스스함을 닮았다.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