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즈>라는 게임이 있다. 게임이라면 판타지 세계로 가서 손에서 불을 쏜다든지, 집채만 한 도끼를 든 동료를 만나 우정을 쌓는다든지, 악마의 성에서 눈물의 결전을 벌인다든지… 그런 현실과는 전혀 다른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게 보통인데(다른 예로 콧수염난 배관공이 점프하여 주먹으로 벽돌을 깬다든가) 이 게임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인생 시뮬레이션’이라고 해야 하나. 내용이라곤 심(=사람)을 움직여서 밥 먹고, 화장실 보내고, 이 닦고, 출근하고, 돌아와서 TV 보다가, 이성이랑 시시덕대다가, 게임하다가(게임 속에서), 자고, 또 일어나서 밥 먹고, 이 닦고…. 이게 전부이다. 심지어 그러다 나이 먹고 죽는 게임. 인생이 자유롭다면 그만큼 자유로운, 굴레라면 그만큼 굴레인, 우리가 도피하고 싶은 인생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는 놀라운 게임이다.
‘아니 누가 그런 게임을 일부러 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심즈> 시리즈는 무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이다. 좋아하는 이유야 가지가지겠지만 이 게임의 가장 큰 매력은 ‘인생은 인생이되 조금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부분이 아닐까. 이 게임 안에서 나의 심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폐인처럼 며칠을 씻지 않고 지내도 되고(심은 몹시 괴로워하겠지만), 온 마을 사람들과 바람을 피우고 다녀도 되고(길 가다 갑자기 따귀를 맞을 수 있다), 착실하게 성공의 길을 걸어도 된다(그럼 번쩍번쩍한 집에서 살 수 있다!). 친환경주의자의 인생을 살아도 되고(샤워를 길게 하면 물낭비로 죄책감을 느낀다), 공원에서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러도 되고(이건 왠지 현실 돋네), 운석을 찾아다녀도 된다(외계인에게 납치당해 성격이 완전 바뀌어서 돌아올 수도 있다). 심지어 심을 죽이는(!!) 가학적인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인터넷에 오른 후기들을 보면: 굶겨 죽이기가 제일 힘드네요… 감전시켜 죽여볼까봐요… 전 방에 들여보낸 다음 문을 없애고 갇혀죽는 걸 지켜봤어요… 요리를 못하는 애한테 가스레인지를 사용하게 했더니 불이 나서 타 죽었어요… 등등. 전 항상 모든 심을 제 자식처럼 키우기 때문에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 심의 상태는 녹색? 빨강?
<심즈>에는 심의 기분을 나타내는 녹색 막대가 있는데 간단히 말해서 등 따습고 배부르고 깔끔하고 친구들과 잘 놀고 잘 싸면 행복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인간 세상 복잡하기에 이런 기본 욕구 외에도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더 있다. 예를 들어 레스토랑에서 멋진 코스 요리를 먹으면 +40, 스파에 가서 좋은 마사지를 받으면 +30, 좋은 그림을 보면 +10, 이런 추가 점수를 받으면 막대는 녹색으로 더 올라간다. 그럼 인생에 의욕이 생겨서 직장에서 능률도 더 올라가고 심은 활기가 넘치지만 반대로 더러운 집 -20, 불편한 침대 -15, 타버린 음식 -10, 이런 것들이 막대를 빨갛게 내리면 능률이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이럴 때 심에게 집안일을 시키면 짜증만 내고(하늘을 향해 팔을 휘두른다) 하루종일 컴퓨터 게임이나 하려고 든다. 허허! 그럼 앨범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어디 보자, 부족한 잠 -20, 배달음식 -10, 알레르기 -30, 갇혀 있음 -40(경고문: 당신의 심은 밖에 나가야 합니다!), 앨범 일정이 무사히 진행될지 불안 -20, <씨네21> 마감을 넘길까 불안 -40. 아아 나도 누가 지금 나에게 집안일을 시키면 하늘을 향해 팔을 휘두르겠지!
그리고 ‘평생행복’이라는 수치가 하나 더 있는데 이건 그때그때 바뀌는 기분이 아니고 쌓여가는 행복이다. 예를 들어 첫 키스를 하면 +1000, 직장에서 승진을 하면 +750, 첫아이를 가지면 +5000 등등. 이 수치가 자주 쌓이면 한동안은 밥을 안 먹어도, 잠을 안 자도 심이 행복해한다. 좋은 일이 있으면 다른 자잘한 것들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처럼. 자, 그럼 올해의 나를 되돌아볼까. 책이 나옴 +3000, GMF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침 +2000, 1집이 2000년대 100대 명반에 들어감(우항) +500, 존경하는 선배들을 만남 +300, <씨네21> 연재를 부탁받음 +300, 이렇게 보니 갑자기 꽤 좋은 한해였다 생각이 드는데 마지막으로 ‘오지은과 늑대들’ 첫 앨범 슈퍼 발매 +5000으로 딱 마감하면 참 좋겠건만….
나는 요즘 은둔형 작가 심을 만들어 플레이하고 있었다. 허름한 시골집에서 낡은 컴퓨터로 하루 종일 소설만 쓰는 만 레이씨. 외톨이 성격이어서 장년이 되어서도 짝을 찾고 싶다는 소망 없이, 나오는 소망이라곤 소설 10권 쓰기, 베스트셀러 소설 쓰기, 인세 얼마 이상의 소설 쓰기 이런 소망뿐이었다. 크게 행복한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300, +500, 종종 +1000짜리의 소망을 충족시켜가며 소소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후사가 없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서 까무잡잡하고 어여쁜 아가씨를 하나 점지해주었다. 텃밭 가꾸기와 독서를 좋아하고 채식주의자인 그녀. 둘은 다행히 사랑에 빠졌고 닭살부부가 되었다. 남편은 소설을 쓰고 아내는 텃밭을 가꾸는 평화로운 나날. 늦둥이 ‘복이’가 태어나고 레이씨는 쉴새없이 소설을 써서 드디어 걸작을 써냈다. 오오 단박에 +6000. 엄청난 인세가 들어왔지만 검소한 부부는 어디에도 돈을 쓰지 않았다. 좁고 낡은 집이었지만 아담한 덕에 가족끼리 항상 같이 있을 수 있었고, 텃밭에서 나는 야채로 만든 음식은 항상 기분을 +25해주었고, 가족 모두가 조용하고 충실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플레이하는 내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떤 심으로 살아갈까
사람 죽는 거 한순간이더라. 요리를 하다 엄마가 갑자기 가고 소설을 쓰다 아빠도 갑자기 가고 막대한 유산과 슬픈 복이만 남았다. 복이는 그 집에는 너무 추억이 많아서 비싸고 멋진 집을 사서 이사를 했다. 테라스에서 바다가 보이는 집이어서 이사하고 내가 다 두근거렸는데 계속 살다보니 그 경치 별로 보게 되지도 않더라. 집이 넓으니까 왠지 동선이 길어 더 불편한 것 같기도 하고, 청소도 힘들고. 아, <심즈>로 배우는 인생. 사실 복이의 어릴 적 꿈은 삽화작가였지만 어머니가 원해서 과학자의 길을 걸었더랬다. 그 덕에 엄마는 +5000되었지만 복이는 퇴직 때까지 직장에서 얻는 즐거움이 하나도 없었다. 계속 ‘그림그리기’ 소망이 떠도 먹고사느라 그릴 시간이 없는 게 얼마나 슬프던지. 그러다 밝고 쾌활한 경찰 여인과 결혼을 하고 남자아이가 둘 태어났는데, 와, 그때부터 내가 프로게이머처럼 마우스를 클릭해야 하던데? 아기를 키우는 건 정말 쉴새없이 바쁜 일이었다! 게다가 부모 중 한명의 자아실현은 무참히 부서져야 했다. 조깅을 좋아하던 아내는 마당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기저귀 갈고, 밥 주고, 걸음마 가르치고, 말 가르치고, 안아주고, 재우고… 집순이 되는 건 한순간이네!
갑자기 오싹했다. 아니, 그럼 나는 어떻게 하나. 내가 가족지향적 심이라 애 낳고 키우는 것에 행복이 몽땅 충족될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반대로 일만 하다가 말년에 혼자 쓸쓸히 TV만 보게 된다면? 아니 그보다 레이는 걸작을 써서 살림이 피었지만 나는 어쩐다? 그런데 그 돈 물려받은 복이는 바쁘기만 하고 별로 행복하지도 않네? 그나저나 애 낳으면 진짜 내 개인적 삶은 끝나는 건가! 뭐든 10년을 파면 얻는 게 있다던데 한 게임을 10년 하니 인생의 깨달음까지 얻는구나. 바다 보이는 집에 살아도, 돈이 넘쳐나도, 플레이하면서 하나도 안 즐겁고 텃밭이 있었던 그 시골집이 그립다. 내가 어떤 심인지, 평생 소망이 뭔지 그걸 알아야 헛다리를 짚지 않을 텐데 그걸 알 수가 없으니 인생이 어려운 거겠지. 아아,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