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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세 “기복없이 노래한 난 ‘행복한 사람’”
2010-11-22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공연 연출팀의 '큐' 사인이 떨어지기 직전, 밴드가 첫곡 연주를 위해 '휘파람'을 불기 전, 술렁거리는 객석 소리를 들으며 무대 뒤에서 기도할 때의 조여오는 긴장감은 정말 맛있어요."

30년가량 숱하게 경험해온 순간을 말하면서도 이문세는 잠시 그 감정에 몰입된 듯 보였다.

21일 충무아트홀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한 이문세는 다음 달 10-12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 올릴 '2010 이문세 더 베스트' 공연을 위해 한창 연습 중이다.

그는 "내게 무대는 여전히 떨리는 곳이지만 첫곡을 부른 순간 '가수 이문세'로 빙의되면 그 떨림이 사라진다"며 "시청자가 주인인 TV 대신 공연 무대를 택하는 건 나의 음악적 만족감을 교감해주는 관객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티켓 파워, 히트곡의 생명력 = 이번 공연은 이문세가 데뷔 이래 처음으로 매회 1만석, 총 3만석 규모로 꾸미는 대형 무대다. 그는 당초 이틀 공연을 예정했으나 티켓이 매진돼 한회를 추가했다. 올해 솔로 가수로는 최고의 '티켓 파워'를 자랑한 셈이다.

그간 '이문세 독창회' '이문세 동창회' '붉은 노을'이란 타이틀로 중소극장 공연에 매진했던 그이기에 이번 무대는 그에게도 새로운 도전인듯했다. 그는 그간 맨 뒤 관객까지 노래의 감동과 자신의 세심함이 전달되지 않는 게 불만이라며 대형 공연장을 꺼렸다.

"이번엔 공간이 커서 겁도 나고 부담도 돼요. 하지만 과감히 시도한 건 이문세란 가수가 표면적으로는 발라드 가수이지만 여러 장르를 선보였기에 죽기 전에 한번쯤은 이 특징을 살린 큰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연출팀, 하드웨어팀과 신경쓰는 건 기술적인 메카니즘을 최대한 이용해 맨 앞부터 뒤 관객까지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거죠."

'더 베스트'란 제목이 붙은데는 복합적인 의미가 있다.

오케스트라, 밴드, 합창단, 무용단 등 150명의 스태프에 제작비 20억원이 투입된 이문세의 첫 '빅 사이즈' 공연인데다 관객들이 좋아하는 곡만 뽑은 '베스트 레퍼토리'가 영상과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라는 게 이문세의 설명이다.

이처럼 그의 공연이 오랜 세월 관객들에게 기대와 신뢰를 준 것은 대표곡의 생명력 덕이다.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 2' 도전자들이 불러 재조명됐고, 여전히 각종 광고에서 흘러나와 잔잔한 여운을 준다.

그는 '옛사랑' '붉은 노을' '광화문 연가' '시를 위한 시' 등 수많은 히트곡을 2008년 작고한 작곡가 이영훈 씨와 3집부터 콤비를 이뤄 발표했다.

그는 "한 블로그에서 내 노래가 삽입된 영상을 보거나 내 노래가 담긴 광고를 볼 때 '참 좋은 곡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영훈 씨가 떠오른다"고 했다.

"영훈 씨는 음악적으로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어요. 단 한번도 과시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없어 했죠. '이게 히트할까요'가 아니라 '요즘은 곡이 안 나와요. 점점 좋은 글이 안 써져요'라고 엄살을 부렸죠. 그러면서 수줍게 내놓은 악보는 소름 돋을 정도로 좋았어요. '붉은 노을'도 '싸구려 음악 같지 않나요'라고 물었던 사람이죠. 한살 어렸지만 형 같이 큰 사람이었어요. 저에겐 지울 수 없는 콤비죠."

◇한차례 시련, '필드'의 현역 = 이문세가 기타를 처음 잡은 건 중학교 때다. 교회를 다니며 특송을 하고 싶었지만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없었다. 에너지와 흥이 넘치는 튀는 목소리여서 합창단에도 끼지 못했다. 독창을 하려면 반주가 필요했기에 집에서 누나가 치던 기타를 찾아내 독학을 시작했다.

그는 "고교 시절엔 성악을 공부했다"며 "대중 가수를 꿈꾼 적이 없어 '롤 모델'도 없었다. 고교 시절 퀸, 송창식과 윤형주의 음악은 접했지만 성악을 해 난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음대가 아닌, 공대로 진학했고 이후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통기타를 치며 노래했다. 이때도 난 단순히 취미로 음악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1978년 CBS '세븐틴' MC로 연예계에 데뷔한 그가 스스로 가수가 직업이라고 느낀 건 1983년 1집 '나는 행복한 사람'을 냈을 때다.

"1집을 내고 '이제 가수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천직이란 걸 그때 처음 느꼈죠."

그러나 직업의식을 충분히 만끽하기도 전 한차례 시련이 찾아왔다. 1985년 3집 '난 아직 모르잖아요'를 낸 직후인 1986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다.

"턱뼈가 부러지고 구강 구조가 엉망이 돼 노래를 못할 정도로 심각했죠. '난 아직 모르잖아요' 히트곡 한곡 내고 가수로선 끝인 줄 알았으니까요. 당시 영동세브란스 의료진의 정성어린 치료 덕에 제 목소리를 찾았어요."

그는 "다시 노래하도록 도와준 의료진에게 신세를 갚고자 1987년부터 이 병원의 근육병 자원봉사 모임과 함께 근육병 환우 돕기 자선 공연을 지금도 열고 있다"며 "23년간 모은 수익으로 재단을 만들어 무료 요양소 건립을 추진 중이다. 이 공연은 내가 평생 짊어질 의무"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자신은 대한민국 가수 중 기복없이 노래한 몇 안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1집 제목처럼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결혼 전 인기가 많지 않았기에 결혼도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며 "내 음악이 여성 취향에 주력하지도, 내가 '꽃미남'도 아니었기에 남성 팬들도 꾸준히 늘어났다"고 웃었다.

지금 그의 팬은 성별을 막론하며 해외에도 잠재돼 있다. 이달 초 일본에서 연 단독 콘서트에서 일본 팬들은 '붉은 노을'을 합창했다.

4년 만에 일본 공연을 연 그는 "일본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폐쇄적인 문화라지만 오히려 다른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나라"라며 "아이돌 가수가 아닌 나의 생소한 노래에도 거부 반응없이 즐겨줘 놀랐다"고 말했다.

이처럼 '필드'에서 현역으로 새로운 관객을 계속 만나고 싶다는 이문세는 신보를 내는 일을 숙제로 꼽았다. 최근 드라마 '욕망의 불꽃'에 삽입된 신곡 '사랑은 늘 도망가'를 발표했지만 자신의 음반 공백기는 꽤 길다.

그는 "올해도 사실 음반 작업을 했다"며 "계속된 공연으로 음반 준비가 계속 미뤄졌다. 내년에는 꼭 음반을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6년간 라디오 '오늘 아침 이문세입니다'를 진행 중인 이문세는 1980-90년대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 지기'로 청소년들에게 꿈을 줬던 그답게 라디오에 대한 애정도 드러냈다.

그는 "라디오 청취자들은 나의 실수를 100% 용서해주고 가족처럼 보듬어준다"며 "드라마에서 히트한 탤런트는 2-3년 지나면 아련하게 기억되지만 10-20년이 흘러도 '별밤 지기' 이문세는 기억해 준다"고 했다.

mim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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