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년간은 앨범을 만들고, 만들고 나면 단독공연을 준비하고, 공연하면 뻗고, 가끔 페스티벌에 나가고, 다른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가고 그러다 또다시 앨범을 만들고 이걸 반복하다보니 상대적으로 클럽 공연은 잘 못하게 되더라. 그래서 예전에 자주 공연하던 곳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같은 게 항상 있었다. 앨범을 내고 나면 또 하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 10월30일, 정말 오랜만에 클럽 공연을 잡았다. 그날 함께 라인업에 있었던 달빛요정님이 토요일에 보자고 트위터로 멘션을 주셨다. 오, 이분도 같이 하시는구나, 반갑게 생각했지만 답멘션을 나중에 한다는 걸 그만 까먹었다. 스마트폰이 없어 컴퓨터로 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다는 게 나의 비루한 변명.
10월30일 클럽 공연에서 만났는데
토요일 공연날이 되었다. 혼자서 어쿠스틱 기타 들고 처연한 노래를 부르던 게 벌써 몇년 전이람. 그런 곳에서 늑대들과 (‘오지은과 늑대들’로 공연) 같이 폴짝폴짝 뛰는 음악으로 공연을 하려니 자꾸 감상에 젖게 되더라. 리허설을 마치고 뒷자리에 계신 달빛요정님께 인사를 했다. 특유의 껄껄껄하는 유쾌한 웃음으로 답해주셨다. 그나저나 항상 이분과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난 다음에 할 말이 없다. 야구 시즌이면 LG얘기라도 할 텐데…. 그런데 생각해보면 거의 대부분의 뮤지션들과 그렇구나. 의외로 이 바닥사람들이 중소심+부끄럼쟁이가 많아서 같이 공연을 한다든지 오며 가며 인사하는 정도로는 친해지기가 힘들다. 서로가 서로를 이미 너무 좋아하고 있어서 보자마자 의기투합이라도 하지 않으면 말이다.
그러고보니 올해 늦봄에 있었던 [LIFE]공연 때도 그랬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때 달빛요정님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던 것 같다. 소심하긴 해도 부끄럼쟁이가 아닌 내가 담배를 피우고 계신 그분께 가서 안면을 텄던 것 같은데, 그때도 반갑게 인사한 뒤에 할 말이 없었던 것 같다. 마지막 곡에 출연진이 다같이 깜짝등장을 해서 <단발머리>를 부르기로 했는데 어쩌다 바로 옆자리에 서게 되었다. 문제는 내가 그날 11cm 하이힐을 신었다는 것. 본의 아니게 그분을 아담하게 만들어버렸다. 미안해서 “죄송해요 제가 오늘 이런 걸 신어서…”라고 사과했더니 껄껄껄 웃으면서 “그러게, 왜 오늘 그런 걸 신고 와서 내 옆에 서요!” 하고 화를(?) 내주셨다. 진심으로 그때 ‘낮은 신발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바로 옆에 안 설걸’ 하고 생각했지만 웃으면서 화를 내주신 덕에 소심한 내 마음도 조금 편해졌다. 좋은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때가 언제였을까. 너처럼 직접 CD를 제작해서 파는 사람이 있대, 라는 얘기를 들었던가, 아니면 인터뷰 기사를 봤던가. 장기하가 이렇게 터지기 전에는 뮤지션이 직접 앨범을 제작해서 직접 파는 행위는 음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묘하게 천대받는 느낌이었다. ‘오죽 계약해주는 회사가 없으면 직접 저래?’ 이런 뉘앙스를 주변의 시선에서 느낀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외롭던 시절에 나 혼자 그분께 동지의식을 느꼈던 것 같다(그래서 몇년 뒤 공연장에서 처음 뵀었을 때도 반가운 마음에 뚜벅뚜벅 걸어가서 먼저 인사를 했겠지…). 그러고나서 나는 혼자 한번 해봤으면 같이도 한번 해봐야겠다 싶어 2집은 회사와 계약을 맺고 만들었고 그 이후는 내 앞가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맨 윗줄에 쓴 바로 저 반복상태로… 비루한 변명이다.
다시 클럽 공연날. 순서는 내가 두 번째, 달빛요정님이 세 번째였다. 오랜만에 하는 클럽 공연은 즐거웠다. 공연을 마치고 어쩌다보니 회의를 바로 하게 되었다. 그러지 말걸. 이런저런 얘기를 길게 하고 뒤풀이도 하지 않고 해산했다. 얘기가 짧게 끝났다면 빨리 클럽으로 돌아가서 3번째 공연도 좀 보고 어쩌면 (낮은 확률이지만) 뒤풀이도 같이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 바닥 사람들은 의외로 뒤풀이를 잘 하지 않는다. 이 역시 아마도 소심+부끄럼쟁이가 많아서. 아무리 그래도 수고하셨다고, 공연 잘 봤다, 고 말하고 같이 뒤풀이도 할걸. 지금 말해봐야 허망한 후회.
달빛요정 이지원님, 안녕
일요일은 하루 종일 집에서 쉬었다. 그리고 월요일, 친구의 전화에 잠에서 깼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랑 토요일에 같이 공연 잘했는데 쓰러지셨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철렁했다. 얘기를 종합해보면 그날 공연 뒤에 술을 많이 드셨고 집에 돌아가신 뒤에 쓰러지셨고, 혼자 사는 탓에 30시간이나 지난 뒤에 발견되었다는 것. 바보같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 나는 왠지 죄책감을 느꼈다. 하루 종일 타임라인에는 쾌유를 비는 멘션들이 넘쳐났다. 나는 퍼뜩 병원비가 걱정되었다. 분명히 한두푼이 아닐 텐데, 괜찮을까? 그러다 모금공연을 기획한다는 트윗에 바로 참가하겠다고 멘션을 보냈다. 금세 포스터가 나오고, 금세 공연 소식이 퍼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몇년 만에 두통이 다시 생겼다. 침대에 종일 누워 심장 박동에 맞춰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으며 자고 또 잤다. 신기하게 낮 동안 계속 잤는데도 밤에도 잠이 왔다. 2시간에 한번씩 깼다. 수십개의 꿈을 꿨다.
토요일이 되었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님께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가서 국화꽃을 올리고 묵념을 했다. 좋은 곳으로 가세요, 음악 마음껏 하세요,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화가 났다. 아니 왜 돌아가신 거예요. 지금 돌아가시면 안되잖아요. 더 잘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더 편하게 살고, 더 행복해지고, 좀더! 더 그러셔야 되잖아요. 왜 지금 돌아가신 거예요. 이 바보 멍충아. 여기까지 갔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상주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아는 얼굴들이 있었지만 인사나 제대로 했나 싶다. 다들 눈에 초점이 없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복도 의자에 잠시 앉아 있다가 그곳을 나섰다. 그날은 너무 울적해서 도저히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새벽 6시까지 아는 사람들과 함께 곱창집에 있었다.
집에 와서 인터넷을 켜니 음원에 대한 얘기가 넘쳐났다. 물론 좋은 뜻으로 하는 얘기지만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졌다. ‘이게 아닌데.’ 일요일은 좌담회가 있었다. 새로 창간하는 잡지에서 선배 뮤지션들과 대중음악의 미래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자리. 에이, 형님들 앞에서 내가 무슨 할 얘기가 있겠어, 나서지 말고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 하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라는 생각의 부끄러움을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나는 끝나가는 좌담회에 허겁지겁 참석했다. 얘기가 끝나고 ‘자 이제 일어날까요’ 할 무렵 ‘저기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하고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직접 제작을 했던 사람만이 아는 것들에 대해, 그리고 불편한 돈 얘기 등을 쏟아냈다. 무서운 형님 뮤지션들 앞에서 그런 얘기로 시선을 받으려니 민망했지만 그래도 꼭 하고 싶었다.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내가 외면하고 있는 것들에 모두 관심을 보일 수는 없겠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나니까 알고 있는 것들을 공유할 수 있다면, 뮤지션이 너무 적나라한 얘기한다 핀잔 들어도, 나댄다는 소릴 들어도, 괜히 정을 맞아도, 그래도 해야겠다. 이진원님. 바보 멍충이는 취소합니다. 헛소리해서 죄송해요. 여러 가지로 죄송해요. 음악 정말 멋있었어요. 멀리서도 멋지게 음악하세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