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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포기해라, 포기해

카프카스러움과 텍스트의 다의성

“아주 이른 아침이었고, 거리는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나는 역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시계탑 시계와 내 시계를 비교해보고,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늦었음을 깨달았다. 서둘러야 했다.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이 길을 찾는 내 발걸음을 더 불안하게 했다. 게다가 나는 이 도시를 잘 알지 못했다. 다행히 근처에 순경이 있어서 그에게 달려가 숨 돌릴 틈도 없이 길을 물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너, 나한테 길을 가르쳐 달라는 거니?’ ‘예, 혼자서 길을 찾을 수 없어서요.’ ‘포기해라, 포기해.’ 사내는 이렇게 말하더니, 마치 웃음과 더불어 혼자 있고자 하는 사람처럼, 내게서 홱 몸을 돌렸다.”

수수께끼 같으면서 섬뜩하고 위협적인

오래전 유학을 위해 독어 회화를 배우던 시절, 교재로 사용하던 책에서 발견한 카프카의 글이다. 단 하나의 문단, (독일어 원문으로) 다섯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글이 내게는 도달할 수 없는 글쓰기의 이상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포기해>(Gibs auf)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지만, 카프카가 남긴 원고에는 제목 없이 그저 ‘코멘트’(Kommentar)라고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무엇에 대한 코멘트였을까? 알 수 없다. 저 짧은 글에 묘사된 상황은 카프카가 실제로 겪은 일일까? 아니면 언젠가 꿈에서 본 장면일까? 상황 자체가 몽환적이어서 어느 쪽으로도 대답하기 어렵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꿈을 생각해보자. 온 힘을 다해 발을 움직여도 몸은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다. 그러는 나를 비웃기나 하듯이 나를 쫓는 이는 성큼성큼 다가온다. 도주는 무의미하다. 비슷하지 않은가? 글 속의 주인공은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그 도시에서 빠져나오려 한다. 기차를 놓치면 도시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으나, 기차의 출발시간은 다가오고, 나는 역에 도달할 길이 없다. 하지만 도시는 거대한 미로. 거기서 유일한 구원자로 여겼던 순경은 외려 ‘포기하라’며 나의 노력을 비웃는다. 현실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나 어딘지 악몽처럼 섬뜩한 데가 있다.

고유명사 뒤에 ‘스럽다’는 어미를 붙여 형용사를 만드는 어법이 있다. 독일어에도 ‘카프카스럽다’(kafkaesk)라는 낱말이 존재한다. 두덴(Duden) 사전은 “카프카의 묘사 방식처럼”이라는 설명과 더불어 그것을 “수수께끼 같으면서 섬뜩하고 위협적인”이라 정의한다. 카프카스러움은 수수께끼처럼 알 듯 모를 듯하여 무서움을 주는 것, 한마디로 언캐니(unheimlich)한 것이다. 이 속성은 상황의 효과이자 동시에 묘사의 효과. 즉 카프카스러운 것은 글 속에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자아내는 효과이자 동시에 의미가 불확실하여 명확한 해석을 거부하는 텍스트 자체의 효과이기도 하다.

네개의 해석

저 텍스트는 어떤 장르에 속할까? 카프카의 짧은 글을 흔히 ‘우화’ 혹은 ‘비유’(Parabel)라 부른다. 하지만 비유는 메시지가 비교적 명확하다. 가령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들을 생각해보자. 탕자의 비유는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달란트의 비유는 타고난 재능의 문제를, 선한 마리아 사람은 민족을 초월한 도덕의 보편성을 말한다. 예수의 비유는 “마음이 가난한(=무식한) 자들”을 위해 신학과 윤리의 추상적 문제를 이해하기 쉬운 일상에 빗대어 설명한다. 하지만 카프카는 다르다. 그는 이해하기 쉬운 일상의 상황마저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제시한다.

그 때문에 카프카의 텍스트는 다의적으로 해석된다. 움베르토 에코는 카프카의 글은 크게 사회학적, 신학적, 실존주의적, 정신분석학적 해석의 네 가지 독해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가령 사회학적 해석을 하는 이들은 위의 텍스트에서 자본주의 관료제 권력의 망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푸코의 주체를 볼 것이고, 실존주의적 해석을 하는 이들은 그 이야기에서 무의미와 부조리한 세계에 사는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을 볼 것이다. 또 신학적 해석을 하는 이들은 거기서 필사적으로 신을 찾아 헤매는 인간 혹은 신을 잃은 무의미 속을 방황하는 인간의 얘기를 읽을 거다.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하는 이들은 그 이야기 속의 경찰관에게서 카프카의 아버지를 볼 것이다. 어린 시절 역경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자기가 가졌던 것과 같은 강인함을 요구한다. 하지만 나약한 아들은 아버지의 요구와 기대를 번번이 저버리며 매번 좌절에 빠지고 만다. 거기서 오는 무력감, 고립감, 고독감과 그 뒤로 이어지는 실존적 체념의 상태. 카프카의 아버지가 동시에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의 ‘아버지’를 의미한다고 본다면 이 상황은 그저 카프카 개인의 체험에 그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상징계의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모든 자식들의 체험이 될 것이다.

형식언어를 사용하는 과학자들에게는 문학의 언어가 너무 다의적이어서 혼란스러울지도 모르나, 문학적 정보처리의 본질은 바로 그 애매모호함에 있다. 가령 고교 시절 국어 시험에서는 한용운의 ‘님’이 부처와 조국과 연인을 모두 가리킨다고 써야 한다. 시인이 하나의 시 안에 동시에 종교적, 애국적, 개인적 메시지를 담아놓았기 때문이다. 카프카 역시 네개의 언어(신학, 사회학, 실존주의, 정신분석학)로 얘기할 것을 하나의 문단으로 압축시킨다. 이처럼 상이한 코드들이 교차하는 지점을 포착했기에, 저토록 짧은 텍스트로도 그토록 많은 해석을 낳을 수 있는 것이리라.

사실 카프카의 글에 대한 모든 해석은 어느 정도 과잉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글 자체가 워낙 짧은데다가 상황의 설정 자체도 너무 불확실하여 특정 해석을 뒷받침해줄 근거들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위의 글에서 내가 누군지, ‘내’가 왜 떠나려 하는지, 그 도시가 어디며 또 어디로 가려 하는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순경이 다짜고짜 반말을 하며 도움을 거절하는지 이유도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함, 그리고 해석의 미결정성이 주는 혼란함과 불편함이야말로 카프카스럽다(kafkaesk)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산문을 ‘로르샤흐 그림’에 비유하는 이도 있다. 로르샤흐 그림이 그린 이보다 보는 이의 심리를 알려주듯이, 카프카에 대한 해석 역시 저자보다는 평자의 생각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에서 접한 어느 글은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시계탑의 시계보다 제 손목시계를 믿었어야 한다’는 썰렁한 교훈(?)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굳이 그 그림을 기술하라고 한다면 카프카의 체념을 이렇게 읽고 싶다. ‘현실 자체가 영원한 미로라면 헛되이 거기서 나오는 길을 찾느니- 어느 미로에 적힌 명문처럼- 그 안에서 현명하게 길을 잃어야 한다.’

일상과 환상

상황은 철저히 일상적이다. 이상한 게 있다면 순경이 다짜고짜 ‘너’(du)라고 반말로 대꾸한다는 것. 그런데도 분위기는 초현실적이다. 이렇게 일상을 환상으로, 악몽으로 제시하면서 ‘언캐니’(unheimlich)한 효과를 자아내는 데에 카프카스러움의 본질이 있다. 이야기는 물론 카프카 개인의 일상에서 나왔을 거다. 하지만 그 일상은 개인을 넘어 모든 이의 환상, 인류의 악몽이 된다. 남자 둘이 여자 하나 쫓아다니다가 차인 다음에 둘이서 술잔 기울이며 ‘아, 인생이란’하고 푸념이나 늘어놓는 것. 홍상수 영화에서 기껏 이런 것이나 반복해 베끼는 것은 카프카스럽기보다는 그냥 찌질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