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참는다. <부당거래>의 공수사관과 <심야의 FM> 속 라디오PD 오정무의 공통 신조가 있다면 아마 이것이 아닐까. 공수사관은 나이도 한참 어린 검사 주양(류승범)에게 늘 쥐어터지면서도 토끼 같은 딸 때문에 꾹 참고 열심히 일한다. 또, 오정무 PD는 고선영(수애)의 딸이 납치되는 와중에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감정을 억누른다. 안타깝거나 이성적이거나, 완전히 다른 이 두 남자를 모두 배우 정만식이 연기했다. 대학로에서는 적지 않은 무대에 올랐고, 충무로에서는 <똥파리>에서 양익준 감독의 친구 만식 역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에서 조연과 단역을 거쳤지만 아직까지 우리에게 정만식은 낯선 이름이다. 그만큼 앞으로 보여줄 것도 더 많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부당거래>와 <심야의 FM> 사이에서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기분 좋은 고민을 하고 있는 배우 정만식을 만났다.

-첫주 약 70만명을 동원한 <부당거래>와 달리 <심야의 FM>은 다소 주춤하고 있다. 표정 관리에 신경 쓰이겠다. =사람들이 <부당거래> 얘기를 꺼내면 ‘오, 그래요?’라고 하다가도 <심야의 FM> 얘기하면 ‘아, 미치겠네’라고 한다. 그래도 <심야의 FM>의 페이스가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나쁜 성적이 아니라서 기분은 좋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 =74년생이다. 류승완 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 ‘사석에서 이런 얘기하는 게 좀 그런데요,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원래 나이를 말씀해주시면 편하게 대하겠습니다’라고 하기에 ‘74년생입니다’라고 했더니 안 믿더라. ‘아니, 괜찮으니까 진짜 나이가…?’라고 되물어서 민증 꺼내서 보여줬다. 73년생인 감독님께서 ‘헉’ 하고 놀랐다. 20살 때부터 무대 위에서 40대 연기도 종종 했다고 말했다. 현재 <모비딕>을 함께 촬영 중인 70년생 황정민 선배님은 ‘나, 이 새끼한테 말 걸기 정말 어려워. 씨. 만식씨, 만식씨’ 할 정도다. (웃음) 그래도 평소에 청바지나 추리닝 같은 거 입고 다니면 후배나 친구들이 내 나이처럼 보인다고 한다.

-류승완 감독이 “내 또래의 가장을 보는 기분”이라는 이유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공수사관에게 가장 애정이 간다고 말했다. =처음에 감독님에게 ‘왜 캐스팅했냐’고 물어봤다. 칼라 있는 셔츠를 입은 <똥파리>의 아저씨와 달리 추리닝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가방을 뒤로 멘 모습이 정말 순박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더라. 그게 먹고사는 데 바쁜 공수사관의 모습과 겹친 것 같다. 다만 공수사관은 열심히 일하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욕만 먹고 일은 잘 풀리지 않고.

-마사이신발을 신고, 보약을 입에 달고 사는 설정이 재미있더라. =모두 감독님의 설정이다. 한마디로 공수사관은 ‘내가 건강해야 부양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다’고 믿고 성실하게 일하는 보통 사람이다. 서로를 죽여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극중 다른 인물들과의 차이점이다. 마지막 장면, 검찰청으로 소환되는 주양(류승범)을 바라보는 공수사관의 눈빛은 ‘주양에 대한 연민’ 플러스 ‘자기 연민’이다. ‘아, 주양이 잡혀들어가면 나는 이제 무엇을 하며 먹고사나’라는 걱정이 앞서는 거지.

-주양한테 구박받을 때 걸려온 딸의 전화에 ‘아빠, 일하는데…’라고 말하는 장면은 짠하더라. 그 대사는 짧아도 톤 조절하는 데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딸 생각하면서 단순하게 한 대사다.

-결혼했나. =안 했다. (웃음) 보통 아빠들이 그러지 않나. 류승완 감독도 그렇게 한다. 둘째딸과 통화하는 감독님의 모습을 우연히 봤다. 스탭들한테 심각하게 ‘이번 신은 뭐 어쩌고저쩌고’하다가 갑자기 ‘어~ 아빠 일하고 있어’라고 부드럽게 말하더라. 공수사관 역시 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그 찰나에 푸는 거다.

-현장에서 류승범과 합을 따로 맞추지 않는데도 매 테이크 다른 연기를 하는 류승범을 다 받아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 게 정정훈 촬영감독의 말이다. =촬영 전 류승범과 처음 만나 함께 밥을 먹었다. 그때 말을 많이 안 했다. 류승범의 젊고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보니 나도 모르게 위축되더라. 게다가 밥을 먹고 나서 당구를 쳤는데 게임에서 졌다. ‘아, 이 그림만 그대로 가져가도 되겠다’ 싶었다. 주양을 ‘내가 모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공수사관의 모든 행동이 설명되더라.

-주양한테 늘 구박만 받다가 갤러리 앞에서 철기(황정민)와 석구(유해진)의 통화내역이 담긴 문서를 주양한테 넘겨줄 때의 표정은 ‘오늘 한건 했다’였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면, 대학로에 처음 와서 연극을 하다가 영장이 날아왔다. 군대 가기 전에 연극에 쓰일 음악을 선곡해놓고 가겠다고 했다. 필요한 음악들을 골라 연출한테 갖다줬을 때 느낀 막내로서의 기쁨과 뿌듯함이 떠올랐다.

-<심야의 FM>은 <부당거래>와 동시에 촬영했나. =<심야의 FM>을 먼저 찍었고, 올해 2월에 <부당거래>가 크랭크인했다. 그래서 어려움은 전혀 없었는데 두 캐릭터 모두 전작에서 해보지 못한 역할이라 어색한 건 있었다. 좀 낯선 호흡으로 가자고 생각했다.

-<심야의 FM>에서 연기한 라디오PD는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이다. =촬영 내내 ‘(감정을) 누르자, 누르자, 누르자’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오정무 캐릭터는 이성적인 인물이다. 라디오 방송이 이루어지는 스튜디오와 유괴범과 사투를 벌이는 고선영(수애)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도 하고.

-가슴보다 머리가 앞서는 역할인 만큼 현장에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것 같다. =극중 오정무가 방송을 중단하려는 방송국 국장들을 막으면서 하는 대사가 있다. 원래는 ‘2시부터 4시까지 하는 이 방송은 제 겁니다’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밖에서 고군분투하는데 방송이 자기 거라고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더라. 그래서 감독님께 ‘이 방송은 고선영 겁니다. 책임은 제가 지고요’로 바꾸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자 ‘좋다’며 수정해주더라. 이런 식으로 바꾼 대사나 설정이 두 차례 정도 있다. 그러다보니 ‘정만식은 작가형 배우야’라고 하더라고. 아놔, 내 머리가 항상 그렇게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부담스러워서 ‘그러다가 애, 헛바람 들어요’라고 말했다. (웃음)

-한 인터뷰에서 마동석씨가 ‘수애에게 뺨을 맞는 정만식이 정말 부러웠다’고 하더라. =내 매니저가 그랬다. ‘내 배우가 맞는 건 정말 못 보겠다. 내가 대신 맞겠다’라고. (웃음)

-일부러 NG 내서 테이크 몇번 더 갈 수도 있었겠다. =아우 말도 마라, 정말 세요. (직접 행동으로 보이며) 보통 여자들은 몸이 이렇게 움직인다고. 그런데 수애는 몸이 뒤로 가요. 손목이 비스듬하게 된다고. 스냅을 쓴다는 얘긴데, 이게 달라요. 이건 한방에 ‘땡큐’다. 첫방에 너무 정확하게 때려서 바로 ‘오케이’났지. 뭐, 내 얼굴이 크니까 안정된 마음으로 때릴 수 있었던 거지. (웃음)

-만식이라는 이름은 아버님께서 막걸리 드시다가 지은 이름이라고 들었다. =그런 건 줄 알았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어머니가 제대로 얘기해주셨다. 형과 나 사이에 한명이 더 있었는데 자연 유산으로 태어나지 못했다. 그때 태몽이 책이었다. 어쨌든 어머니의 몸이 안 좋았던 때다. 그러던 중 나를 임신했다. 가물치 꿈을 태몽으로 꾼 할머니께서 ‘이번에는 튼튼한 남자아이니까 예비로 한번 낳아봐라’고 해서, 나올 수 있었다. 예비였다니. (웃음) 이름이 ‘식’자 돌림인데 어머니께서 완식이와 만식이 중에서 고민하다가 ‘복을 많이 받아라’는 뜻으로 만식으로 지으셨다.

-‘만’자는 가득 채울 ‘만’인가. =그렇지. ‘만땅’할 때 ‘만’. 우리 형은 ‘책과 가물치’, 두 가지 태몽 모두 안고 태어난 거라고 하더라. 가물치답게 어릴 때 좀 거시기하게 자랐다. 그러고보니 몸을 쓰는 건 배우의 일이기도 하잖아. 집에 연극 대본과 시나리오가 쌓이는 걸 보고 ‘아, 이게 태몽으로 꾼 그 책인가’ 싶더라. 그런 걸 보면 사람은 정말 이름대로 사는 것 같다. 예전에 누군가가 ‘정만식은 예명인가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어서 이렇게 답했다. “누가 예명을 만식이라고 지어요? 만식이는 제 이름이라고요.”

-완식이보다는 만식이가 더 나은 것 같다. =민식이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가득 채워야 힘을 내는 팔자라서 그런지 누구 집에 가면 꼭 밥을 얻어먹고 온다. 친구들이 ‘밥 없다’고 하면 ‘아, 밥도 안 먹으면 어떻게 나가라고.’ 하면서 아침부터 라면 세개 끓여먹고 나오곤 했다.

-대학로에서 연극할 때 당시 명계남 대표가 설립한 영화제작사 이스트필름의 제작실장 집에 얹혀살았다던데. =하하하. 최지웅 PD 집에서 함께 살았다. 그 형님은 광주, 나는 목포로 둘 다 전라도 출신이다. 그때 노예였지, 노예. 청소해줘, 밥해줘, 빨래해줘, 차에 기름 넣어줘, 용돈 줘. 하 참, 내가 자기 마누라도 아니고. 역삼동 고기집에서 일하던 때라 지갑에 돈은 넉넉했다.

-사투리를 안 쓰는 것 같다. =보통 안 쓰는데 필요할 때는 쓴다. 누가 사투리 쓰냐고 물어보면 “사투리 쓰죠잉~ 나 목폰디?”라고 한다. 그때 나름 재미있었다. 먹을 밥 있고, 마실 술 있고, 미래가 불투명할 때 이야기 나눌 친구가 있었던 때다. 다만 내 일을 하지 않아서 마음이 허하고 힘들었다. 술 먹고 사고도 많이 치고. 그런 내게 우리 엄니가 처방을 내렸다. “너, 연기만 해. 20대에 돈 버는 거 아녀. 네 일만 해”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다시 극단으로 돌아갔고, 연기를 한 지 10년 만에 부모님을 대학로에 초대해서 첫 무대를 보여드렸다.

-극단 백수광부 시절인가. =맞다. 워크숍으로 올렸던 <자객열전>이란 작품이다.

-비슷한 시기에 극단의 다른 공연에서 지각을 하는 바람에 징계도 받았다던데. =딱 한번 지각했다. 스탭으로 참여한 작품이다. 공연이 지금처럼 원래 정해진 시간에 하는 게 아니라 특별공연이라고 오전 11시에 한 작품이었다. 10분 정도 늦었지만 다행히 공연은 열렸다. 연극이 끝난 뒤, 극단 임원회의에 회부됐다. 대표님께서 “너는 생활은 잘한 것 같은데 아무도 너를 변호하지 않더라”고 하시더라. “잘 견디겠습니다” 하고 나와 ‘1월부터 6월까지 쉬는 시간 동안 뭘 할까’ 고민하다가 극단 지구연극연구소에서 실시한 <굿바이 모스크바>의 오디션을 봤다. 그 연극에 출연해 그해 서울연극제에서 우수연기상을 받고 돌아왔다.

-명계남 대표가 설립한 연기아카데미 ‘액터스21’에는 언제 들어간 건가. =백수광부 들어가기 전인 2000년에 들어갔다. 영화 연기를 배울 수 있었다. 양익준 감독을 비롯해 오정세, 김영재, 우돈기, 김주령 등이 액터스21 출신이다. 모두 프로필 사진을 찍어서 <씨네21> 구인구직 게시판에 열심히 올렸다. (웃음) 덕분에 단편영화 겹치기 출연을 하는 등 좀 바빴다. 명계남 선생님께서 “너 겹치기출연한다”고 하시기에 “단편인데요, 뭐”라고 대답하자 “단편은 영화 아니냐”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처음 연기를 하게 된 것은 친형의 권유라고 들었다. =20살 때 집에서 멍때리고 있었다. 그때 형이 자신의 고등학교 후배한테 내 얘기를 들었다. “형, 만식이가 저랑 같은 교회에 다니는데, 만식이가 연기를 정말 잘해요.” 내가 중3 때 교회에서 한 연기를 본 적이 있는 형은 ‘아, 얘가 연기에 재능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형이 “수원에 아는 극단이 있는데 연기 안 할래?”라고 하기에 바로 거절했지.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다른 극단에 가 있고. (웃음)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부당거래>와 <심야의 FM> 모두 보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께서 <부당거래>를 찍는 도중에 돌아가셨다. 매니저가 감독님을 비롯해 다른 배우, 스탭들에게 알리겠다는 것을 말렸다. ‘절대 눈물 흘리지 말자’고 다짐하고 한참 찍고 있는데, 승범이가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형, 괜찮아요?”라고 묻더라. ‘아, 다들 알고 있구나.’ 그날 촬영분을 겨우 마치고 장례를 치르러 갔다. 그때까지 눈물이 안 났는데, 일을 다 치르고 나서 그 자리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데 그걸 못 참고 말이야….

-차기작은 어떻게 되나. =아까 말씀드린 황정민 선배와 함께 작업하는 <모비딕>과 임순례 감독님의 동물 프로젝트를 촬영하고 있다.

-그렇게 시작한 연기가 여기 오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그런 것 같다. 시나리오를 받으면 ‘이 배역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보다 ‘이 배역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생각한다. 캐릭터를 정만식스럽게 보여준다는 게 아니다. 관객이 나 보러 와서 뭐 하려고? 인물의 전사, 화술, 손짓, 서 있는 자세, 걸어가는 모양새 등, 캐릭터의 입장에서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어렵다면 어렵겠지만 내가 맡은 역할을 보듬어 안으면 가능하다. 또 빨리 갈 것인가, 꾸준히 갈 것인가 중에서 여기저기서 쥐어터지더라도 꾸준히 가고 싶다.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그만큼 보여줄 것은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