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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과 플레이어 도덕성의 상관관계
2001-12-27

해로운 게임은 존재하는가?

게임은 해롭다는 사람이 그렇지 않다는 사람보다 아직은 훨씬 많다. 공부에 방해되고 회사 일에 소흘해지고 애인한테 차일 뿐 아니라, 학원 폭력이나 간질 발작의 원인이 되고, 심지어 뇌에 악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임의 부정적인 영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게임으로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그리고 그중 많은 부분이 게임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폭력적인 사회가 폭력적인 게임을 만들고, 그 사회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게임을 즐긴다. 하지만 간혹 이런 생각이 도전받는다.

<리니지>나 <디아블로>의 아이템이 물밑에서 현금거래되고 있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가끔 아는 사람한테 전화가 와서 아이템 살 만한 데를 가르쳐달라고 그러는 일도 있다. 물론 그럴 수는 없고, 그 김에 평소 궁금하던 걸 묻는다. 도대체 왜 적게는 몇만원, 많게는 몇백만원까지 들여 아이템을 사기까지 하면서 게임을 하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가지다. 플레이하다보면 ‘뒤치기’를 당해 자꾸 죽는데, 너무 분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단다.

플레이어들끼리 서로 죽이는 것, 이른바 PK 문제는 어제오늘 나온 건 아니다. 더군다나 고수들끼리 멋지게 한판 벌이는 것보다는 손쉬운 사냥감을 노리는 일이 많다. 대표적인 PK 게임인 <리니지>를 처음 들어갔다가 불유쾌한 경험을 한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다. 리니지 플레이어들도 이런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리니지> 플레이어이며 원작자이기도 한 만화가 신일숙씨는 어떤 인터뷰에서 ‘문제는 플레이어지 게임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제작사인 NC 소프트도 비슷한 논리를 펼친다.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의 원형은 펜슬 앤 페이퍼 롤플레잉 게임이다. 주어진 룰 아래서 주사위를 굴려가며 다 같이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게임 플레이의 목적은 퀘스트 달성이나 레벨 상승이 아니다. 이는 집단적인 이야기 생산과 향유를 좀더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반면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 그중에서도 ‘핵 앤 슬래시’ 게임의 목적은 생존이다. 퀘스트와 레벨 업 시스템은 전부 던전에 홀로 던져진 게이머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다.

<리니지>는 핵 앤 슬래시 베이스로 디자인된 게임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는 얘기는 게임 디자이너의 무지나 책임 회피를 드러낼 뿐이다. 언어가 사람들의 사유의 폭을 지배하듯 게임에는 게임을 표현하는 언어로서 ‘시스템’이 존재하고 게이머는 이 틀 안에서 행동한다. 모든 플레이어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니라는 주장은 반증으로서의 논리가 빈약하다. 시스템은 경향을 만들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편차를 보이며 경향적 행위를 한다.

핵 앤 슬래시 게임들에서 전부 아이템 현금 거래나 PK가 발생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일단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그게 부정적이라고 판단한다면, 개별 플레이어의 문제로 치부할 게 아니라 시스템을 수정해서 대처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패치를 하겠다는 이야기는 있다. 하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게임의 중독성을 높이기 위해 그런 행동을 방치내지는 조장한다는 주장까지 일고 있는 판이다.

다시 처음 문제로 돌아가본다. 해로운 게임이란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아무리 좋은 시스템도 자기 이익을 위해 망쳐버릴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전부 시스템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하지만 시스템은 구성원의 행동을 심층에서 규정한다. 그리고 남는 것은 더이상은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게임이다. 그런데도 계속하는 건, 지금까지 들인 시간과 돈, 그리고 레벨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게임은 해로운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