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한 통
눈을 뜨고 휴대폰을 여니 문자가 4개나 와 있었다. 웬일이지. 각각 다른 발신인이 보낸 같은 내용의 문자. ‘XX 모친 숙환으로 별세. XX병원 장례식장 31호. 발인 수요일.’ 여자는 바로 여기저기에 문자를 보냈다. ‘몇시에 갈 거야’, ‘누구랑 갈 거니’. 리서치 결과 이미 출발한 사람도 있고 조금 늦게 가는 사람도 있다. 그쪽에 붙어야겠군. ‘출발할 때쯤 연락 줘’라는 문자를 마지막으로 여자는 재빠르게 준비를 시작했다. 재빠르게 샤워, 재빠르게 물기를 닦으며 재빠르게 옷장에서 검은 긴팔 원피스를 꺼냈다. 재빠르게 옷을 훑고는, 흠 다릴 필요는 없겠군. 이건 여자가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장례식에 잘 어울리는 옷이다. 사실 유일하게 어울리는 옷이다. 여자의 옷장에는 딱 두 종류의 옷밖에 없다. 하나는 말도 안되는 무대복. 앞이 팼거나, 또는 끈(?)뿐이거나, 뒤판이 없거나, 앞면이 전부 반짝이거나, 총천연색이거나, 이중 여러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거나…. 그외에는 전부 말도 안되는 추리닝급 옷들.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옅은 화장을 재빠르게 끝내고 구두를 훑었다. 스니커가 압도적으로 많은 여자의 신발장에서 유일한 선택지는 11cm 무대용 하이힐뿐이었다. 그게 유일한 검정색 구두니까.
여자는 같이 가는 친구에게 차비로 바나나우유를 하나 쥐어줬다. 편의점 ATM에서 돈을 찾는 김에 눈에 띄어 샀다. 여자의 출발지는 서울의 서쪽 끝, 그리고 병원은 동쪽 끝이었다. 긴 강변북로를 오후 6시 퇴근시간의 속도로 느릿느릿 달렸다. 차 안에서 친구나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눈 얘기라고는 고작, 술잔은 왼쪽으로 돌리나 오른쪽으로 돌리나. 근데 요즘 술잔 돌리나? 그가 종교가 뭐더라? 기독교던가? 아 부모님은 다른 종교일 수도 있지. 왠지 불교 같은데… 가보면 알겠지 뭐. 그런데 그가 형제가 몇이더라? 누나가 있었어. 그래 나 만난 적 있어. 한명이었나 두명이었나. 그런데 봉투는 거기 있겠지? 얼마 넣을 거야? 5만원? 몇시에 자리를 떠야 돌아오는 길이 안 막힐까? 아 근데 요즘 회사는 어때? 이런 유의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얘기뿐이었다. 가까운 사람의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뜬 건 여자에게 처음 있는 일이어서 여자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슬프다’, ‘큰일이다’ 하는 생각은 머릿속에 들지만 마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여자는 친구에게 그의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얘기를 몇번이고 들었지만 그게 죽음으로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는 아직 ‘우리는 언젠가 모두 끝을 맞게 될 것이다’라는 당연한 사실이 와닿지 않는 나이였다. 대화가 잠시 끊기고 창밖을 보니 강 너머로 63빌딩이 보였다. 빌딩 꼭대기는 이미 짙은 검정색, 밑둥에는 아직 붉은빛이 남아 있었고 그 위로는 가늘게 푸른 그러데이션. 가을 저녁과 겨울 밤의 경계였다.
#기묘하군
국화 화환이 복도 양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향기에 화환에는 조화를 쓰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편의점 바로 옆에 관가게가 있는 것에 놀랐지만 생각해보면 이 또한 당연한 일이다. 여자는 역시 이 구두는 평소에 신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복도를 걸었다. 휘청거리며 구두를 벗다가 상주의 자리에 서 있는 친구를 보았다. 친구는 커다란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사이즈가 맞지 않아서 마치 아버지 양복을 입은 남자 중학생처럼 보였다. 멋쟁이여서 몸에 꼭 맞는 옷만 입던 사람이 어쩌다 저런 옷을 입었을꼬 하며 마음속으로 혀를 차다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여자의 마음이 콰르릉 내려앉았다. 그 눈은 어미를 잃은 동물의 그것이었다. 그걸 보고서야 ‘모친 숙환’이라는 단어가 ‘내 친구는 더이상 그의 어머니와 함께 있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안을 수도 없다’와 같은 뜻임을 알았다. 어쩌나, 내 친구는 이제 어쩌나.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감정의 온도 변화에 여자도 당혹스러웠다. 최대한 안 들키려고 돌아서서 몰래 손바닥으로 얼굴의 물을 닦아내는데 같이 간 친구가 국화꽃을 건네주었다. 앞을 보니 먼저 온 사람들이 꽃을 놓은 뒤 묵념만 하고 있었다. 아, 술잔은 안 돌려도 되는구나, 여자는 안도했다. 왜냐하면 결국 어느 방향으로 돌리는 게 옳은지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구 어머니의 고운 흑백사진 앞에 국화를 놓고 묵념을 했다. 마치 초등학생처럼 ‘좋은 곳에 가세요. 그리고 친구를 지켜주세요’ 하고 빌었다. 여자는 친구의 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하얗게 부은 얼굴의 친구와 악수를 했다. 손을 꽉 쥐는 걸로는 모자란 기분이 들어서 친구를 꼭 껴안았다.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오랫동안 꼬옥. 여자가 비틀거리며 옆방으로 가고 가족은 친구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대체 저 여자는 누구니. 왜냐하면 여자가 자신있게 고른 원피스는 긴팔에 검정색에 가슴도 패지 않았고 길이도 무릎 위로 단정했지만 사실 허벅지에 깊숙한 트임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그 정도 트임은 모든 옷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입고 온 코트 또한 부한 회색 알파카여서 단정한 이미지보다는 복부인쪽에 훨씬 가까웠다. 그리고 친구를 위로하겠다는 뜨거운 포옹은 아마도 맨 앞에서 고생하고 있던 그의 여자친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으리라. 여자의 모자란 부분이 바로 이런 대목이었다.
여자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스스로가 울었다는 사실이 몹시 민망해졌다. 지인들이 낯선 검정색 차림으로 주르륵 앉아 있었다. 시선을 피하며 구석에 앉으니 친한 언니가 “너도 울었구나. 나도 걔 얼굴 보니까 막 눈물나더라”라고 말하며 손을 잡아서 다시 왈칵 올라왔지만 여자는 이번에는 잘 참아냈다. 테이블을 죽 훑으니 누구는 이미 얼굴이 벌겠고, 누구는 파르스름했다. 아무도 그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여자는 언제 울었냐는 듯 금세 깔깔거리고 농담을 하고 심지어는 넉살 좋게 일 얘기까지 꺼냈다. 이곳은 떡과 전과 땅콩이 무한 리필되는 주점 같았다. 기묘한 분위기. 사람들이 조금 빠져나가고서야 친구는 잠시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친구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연애하다 헤어진 바로 다음날처럼?’이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철이 없지는 않기에 여자는 말을 꿀꺽 삼켰다. 지나치게 밝지도, 지나치게 어둡지도 않으면서 위로가 될 말을 찾기란 쉽지 않아 부동산 관련 농담을 했다. 친구가 조금 웃어서 다행이었다.
여자는 왠지 여기에 오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기전을 위해 커피가 필요했다. 이 와중에 여자는 자판기커피는 마시지 않는다고, 제대로 된 카페라테를 파는 곳을 알아낸다고 여럿을 귀찮게 했다. 입구에서 스마트폰으로 작게 음악을 틀어놓고 천장을 보고 있던 매형1은 아메리카노를 부탁했다. 병원에 있는 테이크아웃 체인점은 가보니 이미 문을 닫았고 건너편 블록에 다른 체인이 있다는 얘기에 여자는 기꺼이 8차선 도로를 건넜다. 아, 11cm 하이힐은 정말 일상생활에서 신을 것이 아니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잠깐이라도 앉아서 기다리려 좁은 가게를 둘러보아도 어디 하나 빈 테이블이 없었다. 한 남자가 가게 한가운데에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었는데 여자의 기억이 맞다면 아까 잠깐 눈인사를 했던 매형2였다.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여자는 예의가 아님을 알고도 인사를 않고 커피만 챙겨 나왔다. 매형으로서 장례식장을 지키는 마음은 어떨까. 아 쓰고도 깊다.
#헛헛함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어졌다.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들. 모두 태연하고 이상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헛헛함을 느꼈다. 이럴 때 ‘지인이 어디서 술 먹고 있는지 별표로 표시되는 어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군 현재 청기와사거리 고깃집에서 달리는 중(두 시간째), 박양 현재 상수 근처 카페에서 달리는 중(1시간 반 경과), 최군 사당 근처 호프집에서 달리는 중(5시간째). 그럼 딱 연락하고 좋을 텐데. 이럴 때 단체문자를 보낼 수도 없고 트위터에 지금 술 먹는 사람 손 들어라라고 쓸 수도 없고…. 여자는 휴대폰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얌전히 집에 돌아왔지만 여자의 마음은 자꾸 자리에서 10cm 정도 빗나가 있었다. 오늘 밤까지 완성해야 하는 문서가 있었지만 여자는 자꾸 궁금하지도 않은 뉴스 페이지만 클릭했다. 갑자기 오랜만에 아는 후배에게 연락이 와서 배도 출출한 김에 잘됐다 하고 추리닝 위에 윗옷만 걸치고 그와 그의 동료들이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이미 술자리는 끝판이었다. 만취, 혼절, 시니컬, 밝은 말투의 쓴웃음 등등. 여자는 최대한 싹싹하게 모두와 인사하고 남은 안주를 흡입하려 했지만 술자리는 금세 끝이 났다. 후배의 회사 동료는 ‘두분 먼저 일어나세요’라고 하며 여자에게 술 취한 후배를 건네주었다. 우리는 같이 돌아갈 계획이 아닌데요, 라는 여자의 말은 그다지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억울한 마음으로 대리기사를 부르고 후배를 곱게 보내고 여자는 24시간 하는 카페에 혼자 앉았다. 옆자리의 소녀 둘은 (2년 전의 이효리같은 차림의) 요즘 갓 배운 부비부비에 대해서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창밖이 밝아왔다. 여자는 모르는 사람과 부비부비를 하고 자리를 옮겨서 본격적으로 부비부비를 하는 정서를 처음으로 조금 이해한 기분이었다. 만취를 하고 모르는 사람 옆에서 잠이 드는 마음도 지금은 조금 알 것만 같았다. 오늘만큼은 꼭 살아 있는 사람 옆에서 잠들고 싶다고 생각하며 여자는 아침이 되었는데도 테이블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계속 부비부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소녀들이 여자를 두고 집에 돌아가버리지 않길 바라며.
오지은(뮤지션)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 2장의 솔로 앨범을 냈고, 현재 '오지은과 늑대들'의 정규 앨범을 만드는 중. 여행을 좋아하여 책 <훗카이도 보통열차>를 썼고, 만화를 좋아하여 <커피 한 잔 더> <토성맨션> 등을 번역했다. 갓 서른의 세계에 접어들어, 요즘 특히 알게 된 것도, 알아야 할 것도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