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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작가적 집요함으로 성취한 세태 묘사의 개가

2010년 기억할 만한 데뷔작, 김동주의 <빗자루, 금붕어 되다>

<빗자루, 금붕어 되다>(이하 <빗자루>)는 근자에 본 몇편의 한국영화 중에서 최상급의 놀라움을 안긴 복병이었다. 예기치 않은 한방을 날리는 이런 돌발적인 문제작을 마주했을 때는 이같은 돌연변이를 창조한 사람이 궁금해진다. 이재용, 변혁 등과 동문 수학한 영화아카데미 7기 출신의 늦깎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 영화를 통해 드러나는 감독 김동주의 창작자적 고집은 완고하고 집요하다. <빗자루>에서 그가 그리는 현실의 풍경화는 사뭇 과격하고 도발적이다. 김호선 감독의 <서울무지개>에서 연출부로, 케이블 다큐멘터리 채널인 Q채널의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한때나마 영화 비즈니스의 심장부로 불렸던 삼성영상사업단을 거치며 두터운 이력을 쌓았던 김동주의 이 과소평가된 데뷔작은 현재 인천, 부산, 파주 등 지역 극장 몇 군데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상업적으로 회생할 가망이 없어 보인다. 얼마 전 전화로 이야기를 나눈 그는 천신만고 끝에 개봉한 처녀작에 대한 시장의 냉대에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하지만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선을 보인 뒤 잊혀져, 가뭇없이 묵힐 뻔하다가 생환한 이 불운한 영화는 2010년 기억할 만한 데뷔의 하나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괴이한 문제작이다.

<빗자루>는 모질기만 한 변방에 놓인 한 남자가 어떤 초월적인 힘마저 느껴지는 빈궁의 장력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절망의 기록을 보여준다. 권태와 고독에 몸부림치는 이 사내는 신림동 고시원에 기거하는 오십대쯤 되는 중년의 장필(유순웅)이다. 장필은 처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무기력하고 심약한,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우발적 범죄에까지 연루되는 그는 사줄 것이라고는 언뜻언뜻 비치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심밖에 없는 인물이다. 얼마나 그런 식의 유폐된 생활을 해왔는지, 왜 허름하고 남루한 쪽방으로까지 흘러들게 되었는지의 인생유전은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듯 생략된다. 타인의 곤경을 외면하지 못하는 온후함과 급작스럽게 폭발하는 살의 사이를 오가는 장필의 내면 역시 묘연하다. 다소간 침울하고 요즘 세태와 달리 약삭빠르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성격조차 특화시키기 어렵다. 기명화할 수 있는 정보가 부재한 그가 한줌 남은 자존마저 무참히 유린하는 모멸의 순간에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사체를 유기한다. 영화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살인이 서사의 발화점으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장필의 갑갑증나는 고시원 생활을 현미경적으로 관찰하는 이 영화에는 서사적인 야심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빗자루>의 영화적인 가치는 이런 줄거리 요약으로는 도무지 표현되지 않는다. 극미한 생활사의 세부들을 가지고 거대한 주제를 아우르려는 야심을 지닌 이 영화에서 모든 이야기는 정연한 체계에 따라 나름의 논리를 이루며 전진한다. 영화적 담화의 중심에 놓인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다. 눈 씻고 찾아봐도 행복을 추정할 수 있는 구석이란 별로 없는 고단한 세계의 풍경이 전부인 것처럼 러닝타임을 채운다. 장필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목각인형을 깎고, 복도 바닥을 쓸고, 폐품을 수거하러 다니는 일 따위가 영화를 채운다. 저 누추한 삶일망정 인상적으로 진술해야겠다는 의지가 없이 늘 하던 대로의 생활이 보여질 뿐이다. 고시원 일대의 풍정에 대한 현미경적인 관찰이 이야기를 대신하며, 하층민적 삶의 질정이 응축된 한국적 공간인 고시원은 감탄할 만한 집요함으로 묘사된다. 음습한 골방과 작은 배신과 폭력이 발아하는 골목을 소요하는 장필은 늘 밖으로 나가기 힘든 운명을 암시하듯 꽁꽁 가두어진 형상으로 제시된다.

생활사적 공간의 기하학적 설계

여기서 <빗자루>를 관장하는 이미지의 전략은 모든 것을 과소하게 만드는 ‘미니멀리즘’이라 부르는 형식 미학이다. 김동주가 택한 형식상의 기조는 기교의 간소화와 반복, 장식과 수식의 배제로 요약된다. 못 가진 자의 유별난 곤경을 현란한 수식으로 치장하는 것이 죄악이기라도 한 양, 김동주는 모든 장식적 요소를 배제한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려는 저의가 없으며, 음악을 포함한 외재적 삽입음이 전무하며, 꾸며낸 연기라는 것도 없다. 불과 30개의 숏과 61개의 컷만을 사용한 과문함과 몇 가지 기교만으로 간추려질 수 있는 강박적인 양식미를 고수하는 이 영화의 스타일은 까닭 모를 절망의 웅덩이에 고착된 일상을 간략하지만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특별히 공간의 선택과 전경화는 완강하게 일관성을 유지한다. <빗자루>의 무대 공간이 되는 것은 장필이 기거하는 어두운 쪽방과 좁은 복도, 신발장이 놓인 입구, 세면장, 옥상, 골목, 도로 등 몇 군데가 되지 않지만 각 장소들은 공들여 선택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고시원 내부와 그것을 둘러싼 바깥 장소들은 일관된 이미지 전력에 의해 시각화되고 있다. 한뼘 숨쉴 곳도 없는 복도를 대못을 박아둔 듯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가 끈질기게 비출 때, 관객은 장필이 느끼는 막다른 외로움을 함께 느끼게 된다. 냉정한 자연주의적 기법을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홀연히 더해지는 기이한 양식미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위력적으로 휩쓸고 간다.

모든 면에서 <빗자루>는 작은 스케일을 고수한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스케일이 큰 것과 작은 것은 다른 인상을 자아낸다. 김동주는 막다른 삶으로 몰린 단독자의 습관적 일상을 작중인물의 행동양식을 통해 들여다보는 미시적 관찰기를 선택한다. 고로 현대 한국사회 속의 인간 상황을 암울하게 그려내는 이 영화의 진가는 지루하리만치 반복되는 이미지의 단조로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테레비 삽니다. 냉장고, 컴퓨터, 엘시디 삽니다”라는 말을 리드미컬하게 읊어대는 고물상 노인의 녹음 목소리가 배음으로 깔리는 골목이 반복되며, 취미인지 생계수단인지 모를 목각인형 조각, 절망의 통로처럼 보이는 고시원 복도를 종으로 오가는 빗자루질이 반복된다. 장필의 쪽방과 복도, 옥상, 골목의 풍경은 같은 화면을 리와인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보게 될 정도로 반복적으로 보여진다. 반복은 행위와 공간의 조형에만 있지 않다. 건조한 말과 제스처가 반복되며,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작중인물의 삶을 스타일화하는 방식은 몇 가지 제한적인 기교에 의해 그 반복성을 강화하고 있다. 고시촌 사람들의 무한 반복되는 일상처럼, 김동주는 사전에 정해진 몇 가지 되풀이되는 이미지만을 사용한다. 롱테이크와 롱숏, 전·후경이 고르게 조망되는 딥포커스, 고정된 카메라, 부감, 광각, 사선구도는 미리 정해진 듯하며 대부분의 장면에서 고수된다. 이 대목에서 시간의 생략과 공간의 통일성을 보장하는 롱테이크의 고전적 효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가까이 가기를 의도적으로 꺼리는, 먼 곳의 응시를 통해 끈덕지게 작은 공간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얻어지는 게 있으리라는 김동주의 작가적 고집은 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자연주의와 왜곡의 변증법

<빗자루>의 완고한 형식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냉정한 자연주의적 기법을 따르는 듯하지만 이미지의 왜곡을 통한 표현주의적 긴장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능란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빗자루, 금붕어 되다’라는 제목은 초현실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어떤 의미맥락도 선선히 제공하지 않겠다는 작정을 한 듯 이 비의적 표제는 의미의 그물을 뚫고 달아난다. 물론 ‘빗자루’라는 단어는 고시원 총무의 상징이며, 장필의 처지를 빗댄 이 단어는 쪽방 안에서 그가 키우는 금붕어와 결합되어 폐쇄적인 세계에 갇힌 금붕어의 처지를 장필이라는 인물에게 투사하고 있다. 하지만 다소 도식적으로 연결시킨 단어의 조합이 연상시키는 의미가 영화 전체의 인상에 대한 구속력을 갖지는 못한다.

몇 가지 기념할 만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빗자루>에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나이의 남자가 누려야 할 삶의 축복으로부터 외면당한 장필의 누추한 삶이 표상하는 한국사회의 정황은 일정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배음으로 깔고 있지만, 그들은 역사적 인식이나 현실의식 아래서 재현되지 않는다. 그것이 <빗자루>가 종래의 영화들과 종류를 달리하는 지점이다. 결손의 세계를 바라보는 주관적인 감정이 철저히 배격된 셈이다. 그러나 살인사건 이후 완곡하게 관찰자의 자리로 물러서 있던 화자의 목소리가 강해지면서 영화는 현실에 대한 도식적인 논평으로 자리를 튼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상에 갑자기 끼어드는 살인사건을 통해 김동주는 “자본주의의 화신인 돈의 전이를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살인에 이어 장필의 지갑은 쓸모없는 컴퓨터로 사기를 치는 여자를 거쳐서, 늙은 장필의 하룻밤 상대가 되어주는 여자를 경유해, 골목에서 그를 습격하는 퍽치기의 손에 넘겨진다. 지갑의 이동 경로는 자본주의적 거래의 다층적인 양상을 보여주는데, 다소 과도한 의미부여라는 생각이 든다. 더욱 거슬리는 것은 장필의 호의를 배신으로 갚은 고시원 청년이 옥상에서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며 읊조리는 대사의 선언적 어조이다. 그대로 옮겨보면, “대한민국에서 법 지키면서 돈 벌 수 있는 거 뭐 있습니까. 검사나 형사들 뒤에 졸졸 따라다녀보세요. 걔네들도 범법행위 수두룩합니다”, 이렇게 된다. 이런 식의 선언적 대사는 하지 않은만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제까지 공들여 쌓은 형식미를 통한 이야기의 다성적인 어조는 이 단단한 의미를 지닌 한마디로 풍성한 질감을 잃기 때문이다.

<빗자루>는 기착지가 없는 부랑자의 삶에 대한 르포적인 문제의식이나 무참스런 세계에 대한 고발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사실 하층민의 이야기 혹은 궁핍한 빈민, 룸펜,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변두리 인생에 대한 극사실주의적 묘사는 물릴 만큼 많지 않았던가 말이다. 새삼스럽게 도시 빈민의 삶을 밑그림으로 삼은 이야기가 새롭게 보이는 것은 빈궁의 세태를 포착하고 육화하는 방식의 새로움에서 나온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틀어지게 하면 친숙했던 세계는 갑자기 낯설어진다. 우리는 낯설게 변한 이 세계에서 자신을 규명할 수 없는데, 그것은 이러한 낯섦이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자면, 여러 장소 중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는 프레임 앞에서 예각을 이루며 꺾이는 골목길의 형상이다. 장필이 컴퓨터 모니터 사기를 당하고, 모욕을 준 여자에 대한 우발적 살인이 일어나고, 괴한들에게 퍽치기를 당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도시 빈민의 일상에서 건진 인식

원근감을 극도로 과장하는 광각렌즈로 찍힌 골목장면들을 통해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그 이면이다. 공간의 시각적 형상화 측면에서 <빗자루>의 되새길 만한 성취는 여기에 있다. 김동주의 카메라(실험적인 양식화를 빌미로 김동주는 촬영감독과 마찰이 있었다고 했다)는 각박한 공간을 장면화하는 주요 이미지들을 거의 폐쇄회로 CCTV 화면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잡아낸다. 천장 구석이나 전봇대 위에 매달린 폐쇄회로 카메라를 통해 장필과 그의 생활 공간을 훔쳐보는 듯한 화면의 반복은 변방으로 밀려난 하층민적 삶의 지리한 실재성을 시각적으로 보증한다. 시종일관 만연한 것은 한곳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적당한 거리감과 소외감마저 느끼게 하는 왜곡된 구도와 앵글이다. 이야기의 완결성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김동주는 비탄조의 현실 풍경을 하나의 공간 속에 응축해내고 있는데, CCTV가 만들어내는 깨어진 균형, 계속 보고 있으면 어딘가 낯설고 기괴하게 보이는 느낌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빗자루>가 그리는 현실은 평면적이다. 오래도록, 멀리 있는 피사체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미리 짜여진 이미지의 설계에서는 가급적 카메라를 든 자의 주관을 배제하려 한 리얼리스트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현실의 모습을 무모하리만치 단순하고 시시콜콜하게 스케치하는 이 영화에서는 빈궁한 삶에 대한 입체적인 조망이나 소상하고 생생한 전경화 작업을 찾아볼 수 없다. 자연적 현상과 진배없이 보이는 고시원 삶의 관찰을 통해 <빗자루>는 이야기와 스타일을 요리하는 데 있어 단순한 원칙들만을 가지고도 강렬하게 주제를 환기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층민의 삶에 눈을 맞추려는 영화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지만, 그들의 곤궁을 영화 형식의 힘으로 절감하게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감독 자신의 말마따나 “이렇게도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도시 빈민의 일상에서 예리한 인식을 길어 올리려는 의지를 <빗자루>는 보여준다. 흔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삶의 한 양태를 정형화된 양식을 통해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속한 세계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김동주의 방식은 평가될 만한 것이다.

장병원(영화평론가)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 프로그래머. 재는 것 없이 원껏 써보라는 <씨네21> 편집진의 주문을 따라볼 생각이다. 한편의 영화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기보다 좁은 주제로 깊게 파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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