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하천오염으로 주민은 죽어가고 있는데 정치인은 뇌물이나 받아챙기는 나라에서, 국민의 안전이 지켜지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는 무슨 희망을 갖고 어떻게 애를 키우고 살아야할까요?"
순진하면서도 답답한, 그러나 진심이 느껴지는 서혜림의 연설에 하늘도 울고 유권자도 울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에서 납치범에 얻어터진 얼굴을 한 채 마이크를 잡고 온 마음을 다해 울부짖는 서혜림의 모습은 드라마 속 이야기지만 화면을 넘어 시청자의 심금도 울렸다.
SBS TV 수목극 '대물'이 정치 문외한인 한 여성의 좌충우돌 정계 입성기와 정치권의 복마전을 다루며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6일 첫선을 보인 이 드라마는 2회에서 20%를 넘기더니 21일 6회에서는 수도권 시청률이 30%를 돌파하는 등 가파른 시청률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선덕여왕'에서 '미실'로 국민적 사랑을 받은 고현정의 차기작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은 이 드라마는 고현정의 얄미울 정도로 변화무쌍한 연기와 선거판의 저열하면서도 피말리는 경쟁, 정치권의 이면을 그린 스토리가 잘 어우러져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이야기의 저변에 깔린 신파 코드는 이 드라마가 자칫 딱딱하고 낯선 정치 드라마가 되는 것을 막아준다.
촬영 전 작가 교체에 이어 최근에는 연출자까지 바뀌는 내홍에도 불구하고 '대물'은 현재 '방송가의 대물'로 떠오르고 있다.
◇"역시 고현정"..'천의 얼굴' 과시 = '대물' 인기의 1등 공신은 역시 고현정이다. 그는 주인공 서혜림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변화무쌍한 천의 얼굴로 기막히게 표현하고 있다.
뉴스 리포팅을 하던 중 고소공포증으로 기절하고 딸꾹질을 하는 등 잇따른 실수로 촉망받는 신입 아나운서에서 한순간에 어린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나운서가 된 서혜림. 카메라맨과 결혼한 후에는 대출금 갚는 걱정을 하며 평범한 맞벌이주부로 살아가던 그는 아프간으로 취재간 남편이 탈레반에 납치돼 목숨을 잃으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다.
그가 남편을 잃은 후 청와대 앞에서 "나라없는 백성도 아닌데 국가의 아무런 보살핌도 못받고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 나라에 대해 내 아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하냐"고 절규하는 장면에서 많은 이들이 "역시 고현정"을 외쳤다.
이 모두 2부 한 회에서 그려진 내용인데, 고현정은 실수하는 아나운서의 코믹연기에서부터 바가지 긁는 아내, 남편 잃고 절규하는 연기까지 극단의 모습을 봉제선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매끈한 비단옷처럼 그려냈다.
'선덕여왕'에서는 '미실'이 시종일관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일관된 모습을 보여줬다면 '대물'의 서혜림은 특별할 것 없는 맞벌이주부가 대한민국 최초 여자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다양한 표정을 드러내야한다.
이미 1회 도입부에서 대통령이 된 서혜림의 카리스마를 과시한 고현정은 이후 플래시백으로 전개되는 스토리에서 시치미를 뚝 뗀 채 순진무구하고 여린 여성으로 돌아왔다.
◇혼탁한 선거판서 클린정치 꿈꾸다 = 남편과 직장을 잃고 패닉상태에 빠진 서혜림은 집권 여당의 젊은 기수 강태산(차인표 분) 의원의 권유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극적으로 당선된다.
드라마는 3-6회에서 이 선거과정을 다루며 권모술수와 흑색선전, 폭로전이 판치는 선거판의 모습과 정치인들의 비열한 두 얼굴을 비교적 적나라하게 그렸다. 같은 당내에서 벌어지는 신구 세력의 권력다툼과 정치인과 기업인의 표변하는 이합집산은 너무 현란해 정신을 쏙 빼놓기도 한다.
또한 열혈 신참 검사 하도야(권상우)가 법과 정의가 권력 앞에서 농락당하는 것을 보며 좌절하면서도 꿋꿋하게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것을 통해 정치검사들의 이야기도 조명했다.
돈도 없고 경력도 없는 서혜림은 새로운 정치를 꿈꾸는 강태산과 손잡고 출마를 했지만 혼탁한 선거판에서 그의 '클린 선거'는 야유와 조소의 대상일 뿐이다.
법정선거비용을 지키고 당으로부터 지원도 받지 않으며 상대 후보가 흑색 허위 폭로전을 벌이는 데도 대응하지 않는 방법을 고수한다. 이런 서혜림의 모습은 너무 이상적이라 거리감을 주기도 하지만 "내 아들이 쳐다보는데 어찌 나쁜 짓을 하겠냐"는 그의 태도는 금세 시청자의 경계심을 허물어버린다.
6회 마지막에서 당연히 낙선한 줄 알고 있던 그는 막판 뒤집기로 경쟁자를 불과 11표 차로 제치며 국회의원이 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드라마는 가능하게 만들며 서혜림이 꿈꾸는 '클린 정치'에 힘을 실어줬고, 시청자도 같은 꿈을 꾸며 표를 몰아줬다.
◇심금을 울리는 신파 = 이 드라마의 무시 못할 힘은 신파에 있다.
카바레에서 제비짓을 하던 껄렁한 문제아 하도야가 아버지가 국회의원의 신발을 핥는 굴욕을 당하자 개과천선해 공부에 전념, 검사가 되는 과정이나 국가가 지켜주지 않아 남편을 잃은 여인이 분노를 토해내며 정치판에 뛰어드는 과정에는 질펀한 신파가 깔려있다.
놀라울 정도의 비약과 개연성 없는 전개에도 불구하고 애끊는 절절한 감성에 호소하는 전법으로 드라마는 모든 장애를 뛰어넘고 선거까지 치렀다.
연하의 열혈 청년 검사 하도야가 애 딸린 과부 서혜림에게 조건없이 마음을 주는 것 역시 이해불가지만 드라마는 이 역시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며 '인간애'로 풀어내고 있다.
덕분에 하도야를 맡은 권상우는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오염되지 않는 순애보를 불태우는 순정남이 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prett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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