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진중권의 아이콘] 오, 신성한 무지여

‘타진요’와 범주 오류

영국의 철학자 길버트 라일의 저서 <정신의 개념>에 나오는 예화. 옥스퍼드대학을 보러온 방문자에게 대학에 소속된 단과대학과 도서관을 비롯한 시설들을 보여주었다. 캠퍼스의 모든 시설을 둘러본 뒤 방문자는 안내하던 이에게 기껏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대학은 어디에 있지요? 단대(college)에 소속된 이들이 기거하는 곳, 행정업무를 맡은 이들이 일하는 곳, 과학자들이 실험하고 휴식하는 곳은 봤지만, 당신 대학의 성원들이 기거하면서 일하는 대학(university)은 아직 보지 못했네요.” 이 옥스퍼드 방문자의 논리적 실수를 라일은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라 불렀다.

범주 오류란 ‘어떤 사물을 그것이 속하지 않는 집합에 집어넣는’ 실수를 가리킨다. 라일이 보기에 철학은 이런 오류로 가득 차 있다. 대표적인 것이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즉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를 모두 ‘실체’(substance)라 불렀다. 하지만 신체는 공간을 차지하나, 정신은 그렇지 않다. 뇌를 열어봐도 거기서 정신을 볼 수는 없잖은가. 이렇게 정신과 신체는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하는데, 데카르트는 이 둘을 같은 범주 안에서 묶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라일은 데카르트의 정신을 ‘(신체라는) 기계 속의 유령’이라 비꼰다.

범주 오류는 주로 우리 언어가 다른 것을 가리키는 데 동일한 문법적 형식을 사용하는 데서 비롯된다. 가령 ‘그녀는 홍수처럼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왔다’와 ‘그녀는 가마를 타고 집으로 왔다’는 문장을 비교해보자. 영어에서는 ‘눈물을 흘리며’(in flood of tears)와 ‘가마를 타고’(in a sedan chair)가 동일하게 ‘in’이라는 전치사로 표현된다. 하지만 둘은 물론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범주 오류는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에게 흔히 나타나나, 어른들이라고 거기서 자유롭지는 않다. 가령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걸렸다는 소리에 “가까이 가지 마”라고 대꾸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언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철학자들마저 흔히 빠지는 게 범주 오류다. 그러니 철학적 훈련을 받지 않는 대중이야 오죽하겠는가? 가령 최근에 벌어진 타블로 소동을 보자. 소란의 원인은, 우리가 ‘공인’이라는 동일한 문법적 형식으로 가수나 배우 같은 연예인과 총리나 장관 같은 공직자를 모두 가리킨다는 데에 있다. 가수를 ‘공인’이라 부를 때에는 그의 활동이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다는 뜻이고, 총리를 ‘공인’이라 부를 때에는 그의 활동이 공적 임무에 속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타블로에 대한 대중의 비판은 사실상 공직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와 동일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공인’의 문법

미국에서는 연예인도 ‘공인’이라 부른다지만, 이 역시 연예인은 일반인보다 사생활을 덜 보호받는다는 뜻이지, 연예인들에게 공직자 검증과 같은 잣대를 들이대라는 뜻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타진요 회원들의 요구가 정확히 공직자 검증의 패러디였다는 점. 그들은 타블로의 자료에서 의심스러운 점 몇 가지를 제시해놓고 막무가내로 해명을 요구했다. 정상적인 경우 입증의 책임은 의혹을 제기하는 쪽이 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인사청문회의 경우에는 의혹의 당사자가 해명하게 되어 있다. 공직을 맡아야 할 사람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타블로에게 공직을 맡겼던가? 물론 타블로의 해명을 듣고, 거기서 의문을 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의문을 품은 개개인의 주관적 궁금증에 불과하기에, 타블로가 그 의문에 일일이 해명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개인적-주관적 궁금증과 객관적-사회적 의혹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역시 또 다른 범주 오류다. ‘공인’의 개념에 대한 오해, ‘입증’이라는 표현의 문법, 개인적 궁금증과 사회적 의혹의 혼동. 이 세 가지 오류가 하나로 합쳐져 이윽고 이 사태의 가장 커다란 역설을 낳는다. ‘그들은 사실은 철저히 의심하면서 의혹은 굳건히 신뢰했다.’

타진요 회원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굳게 믿는다. 심지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갖고 있다. 일부 고약한 이들도 있겠지만, 19만 회원의 다수는 순진하고 순수할 거다. 범주 오류는 도덕적 오류가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논리적 오류다. 도덕적 오류는 아마도 그들이 타블로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는 그 순간에 발생할 것이다. 이와 달리 대중을 현혹하기 위해 범주 오류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의도적 성격의 범주 오류는 궤변론법(sophistry)에 속한다. 최근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가 <경향신문>에 보낸 글이 아마도 그것의 좋은 예가 될 거다.

‘외교’의 문법

“북한의 3대 세습에 왜 침묵하느냐?”는 <경향신문>의 지적에, 그는 북한과의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려면 체제에 대한 비판은 삼가는 것이라 대답했다. 하지만 북한과 남한의 외교적 관계를 관리하는 것은 민노당이 아니라 외교부의 역할. 게다가 3대 세습에 비판적 견해를 갖는 것과 3대 세습에 비판을 삼가는 게 서로 모순되는 것도 아니다. 가령 당원들을 향해선 3대 세습을 비판하되, 북을 향해선 공개적 비판을 삼갈 수도 있다. 그런데 민노당이 어디 그런 경우에 속하는가? 이 대표의 논변은 이 두 범주를 뒤섞음으로써 공당의 이념적 성향을 대중에게 은폐하고 있다.

그가 동원한 또 하나의 논변은 왜 신앙 고백을 강요하느냐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원하지 않는 질문엔 답변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심지어 법정에서조차 묵비권은 인정된다. 이 대표는 이를 들어 <경향신문>을 마치 공안검사나 되는 양 몰아붙인다. 하지만 개인과 정당은 범주가 다르다. 개인에게는 자신의 양심을 말하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공당에 그런 자유란 없다. 공당은 대중 앞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표와 이념적 성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게 싫다면 정당이 아니라 개인으로 남을 일이다. 이 대표의 논변은 범주 오류를 이용한 궤변론법의 모범적 예다.

궤변이 존재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스탠퍼드대학에서 졸업증명서를 떼어서 제출해도 여전히 타블로가 학력위조를 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고작 3대 세습이나 벌이는 봉건왕조로 전락해도 북한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표방하는 대의(?)에 대한 충성과 헌신도 남다른 구석이 있다. 그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의도적인 범주 오류로 대중을 현혹하는 이들은 비난할 수 있겠지만, 머릿속으로 범주를 정리하지 못해 오류에 빠진 이들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저 유치한 수준의 궤변을 믿어주는 충성스런 이들. 그들은 정말로 저 궤변을 믿는 걸까? 아니면 나로선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절실한 실존적 이유에서 필사적으로 그것을 믿고 싶어 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어리석으나 헌신적인 영혼들에게, 화형대에서 불타 죽도록 인간 이성의 힘을 믿었던 조르다노 브루노의 시니컬한 소네트를 바치고 싶다.

“오, 성스런 무지여! 성스런 어리석음과 경건한 헌신이여! 그것이 네 영혼을 너무나 선하게 만들어, 인간의 기지와 열정을 무색하게 만드노라. 참을성있는 조심성은 (…) 네 저택을 지을 천국에 이르게 하지 못하리니, 너의 연구와 지적 욕망이 (…)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