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에 따르면, 인간에게 ‘희망’을 선물로 준 것은 프로메테우스이다. 올림포스 신들이 지상의 인간들에게 보낼 오만 가지 고약한 선물들을 판도라의 항아리에 담아 내려보낼 때, 그 항아리에 유일하게 ‘희망’이라는 선의의 품목을 넣어준 신이 프로메테우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두 가지 것을 선물한 셈이 된다. ‘불’과 ‘희망’이 그것이다. 인간에게 하늘의 불을 훔쳐다준 것도 프로메테우스이고, 불을 갖게 된 인간을 약화시키기 위해 제우스가 재앙단지를 내려보낼 때 거기 또다시 제우스의 의도에 반(反)하는 엉뚱한 선물을 슬쩍 집어넣어 끝까지 인간의 편에 서기로 한 것이 프로메테우스이다.
그런데 희망은 축복인가, 재앙인가? ‘오늘’의 절망을 견딜 수 있는 인간의 힘이 ‘내일’에 대한 희망에서 나온다면 희망은 축복이다. 그러나 이 축복은 ‘무지’를 조건으로 한다. 인간이 내일에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그 내일이 그에게 알 수 없는 무지의 영역이고 철저히 가려진 미지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내일에 관한 한 우리는 장님이다. 내일은커녕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향한 희망은 장님의 희망이다. 프로메테우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아이스킬로스의 <묶인 프로메테우스>에서 그는 그가 인간에게 준 희망이라는 선물이 ‘맹목의 희망’(blind hope)이라 말한다. 희망은 눈이 멀어 있다. 맹목이 아니라면 희망은 이미 희망이 아니다. 눈 먼 희망은 인간에게 축복인가?
2001년의 첫 아침이 밝았을 때 그로부터 아홉달 뒤 뉴욕에서 대참사가 터질 것임을 예견했던 사람은 없다. 사건 당일 아침에도 사람들은 일상의 질서에 따라 세계무역센터 건물의 직장으로 출근하고 동료들과 “굿모닝”을 나누었을 것이다. 9월의 그 좋은 아침이 ‘좋은 저녁’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1분 뒤에 지옥이 들이닥칠 것임을 사건 1분 전에 안 사람은 없다. 그들이 알았던 것은 일상의 질서이지 그 질서의 느닷없는 붕괴가 아니다. 일상은 미지(未知)라는 이름의 어두운 심연 위에 설계되어 있다. 그 심연은 보이지 않는다. 2001년이 ‘미래’로 다가왔을 때 사람들이 기대와 희망의 폭죽놀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둡고 괴이한 심연이 잘도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전능의 신이 보았다면 그 장님들의 폭죽놀이는 얼마나 딱한 것이었겠는가.
그 2001년이 가고 있다. 미래였던 것이 과거가 되고 미지였던 것이 ‘기지’(旣知)의 것으로 바뀐다. 2001년을 잊기 위해 우리는 망년회에 나가고, 지나간 정초에 그랬던 것처럼 새해를 위한 폭죽놀이를 준비한다. 그러나 망년회를 치르면서 우리가 잊어버릴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의 첫째 항목은 “우리가 과거를 아는가?”라는 질문이다. 미래는 모르지만 과거는 이미 우리가 겪은 것이기 때문에 잘 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미래를 모르듯 과거에 대해서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과거를 모르기 때문에 되풀이하는 실수, 재앙, 고통도 너무 많다. 9·11 뉴욕테러는 과거의 사건이 되었지만, 그런 일이 ‘왜’ 벌어지는지 우리가 지금 잘 아는가? 알고자 하기나 하는가? 세계가, 그리고 세상이, 왜 이 모양이어야 하는지 우리는 알고자 하는가?
아랍 설화에 <방귀대왕>이란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의 가스 방출음이 하도 크고 요란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한번은 그가 정말로 천지를 진동시키는 메가톤급의 가스를 방출하게 되고 후일 사람들은 그해를 “방귀대왕이 큰 방귀를 뀐 해”로 기억한다. 2001년도 몇년 지나면 간단히 “응, 그 뉴욕사건 터진 해”로만 기억될 공산이 크다.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뉴욕사건 같은 것의 재발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사건의 기억말고도 사건의 ‘왜’를 알고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 지난 1년 역시 한국인들로서는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뛰자”라는 슬로건에 목매단 한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기억하고 생각하기보다는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않으려 하며 비판적 사유보다는 그런 사유를 포기하는 데 더 능란하다. 지성은 시궁창에 처박히고 통찰은 망각에 압도된다.
과거를 아는 것은 미지의 미래에 대한 최선의 대책이다. 기억은 부담스럽지만 그것없이 미지의 심연을 건너갈 방도는 없다. 2001년의 ‘왜’를 잊지 않는 것이 2001년을 가장 잘 보내는 방법이다. 잘 가라, 2001년이여.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 jidoh@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