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이라는 것은 사태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는 급진적(radical)이라는 말이 라틴어 radis(뿌리)에서 나왔다는 얘기에 불과하나, 마르크스가 굳이 이렇게 낱말의 어원을 상기시키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흔히 ‘급진적’이라고 하면 현실에서 유리된 사유와 행동의 ‘과격함’이 연상된다. 그런 의미에서 급진적으로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다. 그저 단순무식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 말의 어원에 합당하게끔 “사태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 특히 그 ‘사태’가 자기 자신일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어느 나무가 제 뿌리를 땅 밖으로 드러내기를 원하겠는가?
필연과 우발, 두가지 유물론의 대립
한때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자신의 내적 모순에 따라 필연적으로 몰락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1917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러시아는 당시에 유럽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이 매우 늦은 축에 속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논리적 모순을 해결한 것은 레닌. 그는 사회주의 혁명이 세계 제국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먼저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재치있는 수정을 통해 볼셰비키 혁명은 졸지에 ‘역사적 필연성’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 그것은 제국주의에 이른 독점자본주의의 모순이 터져나온 것이다.’
하지만 과연 러시아 혁명이 역사의 필연이었을까? 러시아 민중은 사회주의를 원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전쟁을 반대했을 뿐이다. 2월혁명으로 그들이 전복시킨 것은 근대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봉건적 절대왕정이었다. 10월혁명 역시 실은 전형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민중은 사회주의를 원한 게 아니라, 그저 케렌스키 내각이 전쟁을 계속하는 데 반대했을 뿐이다. 볼셰비키 혁명은 산업노동자의 총파업이 아닌, 무장한 병사와 노동자를 동원한 군사 쿠데타에 가까웠다. 케렌스키 내각이 집권 뒤 전쟁을 포기했다면 상황은 어떻게 됐을까?
멘셰비키는 사적 유물론을 제대로 신봉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산물, 사회주의가 있으려면 먼저 자본주의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혁명 이후의 상황은 부르주아가 주도해야 한다. 그게 역사의 필연이다.’ 반면 볼셰비키는 사적 유물론의 교리에 글자 그대로 매달리지 않았다. ‘보편적 법칙은 나라마다 변형되는 것. 교리야 뭐라 가르치든 기회가 오면 일단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멘셰비키가 역사적 ‘필연성’(necessity)에 매달렸다면, 볼셰비키는 역사의 ‘우발성’(contingency)을 이해했다. 이중에서 진정으로 유물론적인 것은 과연 어느 쪽일까?
역사는 필연적 기술인가 우발적 사건인가
여기서 역설은 마르크스의 교리에 집착하는 태도야말로 관념론적이라는 데에 있다. 레닌 역시 사적 유물론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역사의 필연성이 아니라 사건의 우발성에 따라 행동했다. 물론 그는 자신의 ‘행동’을 역사적 필연성으로 설명할 줄 알았다. 제국주의 단계에 이르면 자본은 이윤율 경향적 저하법칙에 맞서 초과착취가 가능한 제3세계로 이동하고, 이로써 혁명은 선진자본주의의 내부가 아니라 그것의 변방에서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그의 예언은 실현된 듯했다. 실제로 여러 나라가 반제투쟁의 과정에서 공산화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런 것을 정말로 ‘역사의 필연’이라 불러야 할까? 가령 러시아에서 노동자의 비중은 인구의 10%를 넘지 않았다. 그중에서 서구자본이 운영하는 기업에서 초과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수가 과연 얼마나 됐겠는가. 중국의 경우 산업노동자는 인구의 1% 미만이었다고 한다. 서구자본의 초과착취를 당했다는 제3세계는 자본주의 발달이 극히 미미했다. 착취가 있었다 해도 그것은 자본주의적 착취라 보기 어렵고, 해방이 필요했다 해도 그게 반드시 사회주의일 필요는 없었다. 가령 베트남전쟁은 사회주의 혁명보다 민족해방전쟁에 가깝다고 하지 않던가.
한때 사회주의가 세계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그중에서 마르크스가 예견한 고전적 방식으로 공산화된 나라는 하나도 없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회주의화는 소련의 무력 개입으로 이루어졌다. 어떤 의미에선 이것도 필연성일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의한 사회주의의 필연성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최근 이들 나라들이 대거 자본주의로 복귀한 것은 그 혁명(?)이 매우 우발적이었다는 사실의 결정적 증거이리라. 역사학은 모든 사건을 필연적으로 보이게 기술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역사는,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발적 사건으로 만들어진다.
혁명가 대신 아이러니스트!
레닌은 이를 정확히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주장을 폐기했다. 사회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을 말하면서도, 그는 대중의 자발성을 믿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는 소수의 전위들에 의해 노동자계급의 외부에서 주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만큼 반마르크스주의적인 생각이 다시 있을까? 게다가 ‘전위’를 자처하는 그자들의 출신성분은 대부분 부르주아의 자식, 아니면 프티 부르주아였다. 아무튼 레닌은 성공을 거두었고, 자신의 올바름을 실천으로 증명했다. 이것이 레닌의 아이러니다.
어떤 면에서 레닌은 리처드 로티가 말한 ‘아이러니스트’(ironist)를 닮았다. 로티에 따르면,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의 최종어휘에 대해 급진적이며 지속적인 회의를 갖는” 사람이다. ‘최종어휘’(final vocabulary)란 물론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세계관의 토대가 되는 믿음을 가리킨다(데리다는 이것을 ‘초월적 기표’라 부른다). 레닌에게 그 최종적 어휘란 마르크스주의, 즉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따른 사회주의의 필연성일 것이다. 레닌은 입으론 마르크스의 후계를 자처하면서도 몸으론 마르크스의 핵심적 명제에 대한 ‘급진적이며 지속적인 회의’를 실천했다. 물론 레닌은 포스트모던한 아이러니스트는 아니었다. 로티에 따르면, 아이러니스트가 되려면 다른 조건이 필요하다. 가령 아이러니스트는 “그들의 어휘로 정식화된 논증이 이 회의를 감소시키지도, 해소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자신들의 어휘가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현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레닌은 전형적인 근대인. 그는 또 다른 논증(‘약한 고리’)으로 자신의 회의를 해소하려 했고, 나아가 자신의 어휘가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현실에 더 가깝다고 확신했다. 거기에 따른 위험은 그의 사후 스탈린을 통해 현실화한다.
과거에 혁명은 진리를 소지한 전위들이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외부로부터 주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의 무오류’라는 터무니없는 이론과 숙청의 드라마라는 잔혹한 실천을 낳았다. 그런 것은 한마디로 시대착오, 더이상 현대의 정치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날 세계를 바꾸려는 사람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졌어도, 그들과 내가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신의 믿음을 상대화해야 비로소 타인과 소통이 가능하다. 소통이 가능해야 연대도 가능하고, 연대가 가능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은가.
급진적인 것은 사태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급진적으로 되려면 무엇보다 제 뿌리로 돌아가, 제 신념의 토대를 힘껏 흔들어보아야 한다. 오늘날 사회를 바꾸는 데에 필요한 것은 확신에 가득 찬 혁명가가 아니라, 회의로 번민하는 아이러니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