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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윌리엄 와일러가 되다
2001-03-08

<옛날 옛적에…>로 흥행에 참패하고 <장마>를 찍다

역시 신비주의와 샤머니즘 계열의 1978년작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는 최인훈의 희곡작품이었는데 어느 극단의 공연을 보고 나는 영상화하는 꿈을 키웠다. 마침 나의 전작인 <>(1977)이 우수영화상을 수상하자 제작자 강대진(현 전국극장연합회 회장)이 그 공로를 인정했음인지 나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었다. 어차피 흥행물은 아니니까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연극은 무대라는 좁은 공간에 그 일루전을 집약적으로, 구심점을 갖고 표현했으나 영화는 넓은 공간과 다양한 영상표현이 가능하기에 나는 시네포엠으로 그 몽환적 세계를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관객의 반응은 화면은 아름답고 서정적이나 너무 상징적이어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흥행은 참패하고 말았다.

1979년 <장마>는 <불꽃>(1975)으로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남아진흥의 고 서종호 사장이 제안한 영화다. 어느 날 윤흥길의 소설 <장마>를 들고 온 서 사장이 “유 감독은 한국의 윌리엄 와일러니까…”라고 추어올리면서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테마는 남북분단과 이데올로기의 아픔을 거치면서 결국 민족의 동질성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 당시 남쪽에 시집간 딸(선우용녀)네 집으로 피난내려온 외할머니(황정순, 소설은 어린 외손주 동만의 시각으로 전쟁과 사람들을 묘사한다)와 대학생인 외삼촌(강우석) 그리고 처녀인 이모가 사돈댁인 할머니(김신재)의 환영으로 다정한 생활을 해나가는데 어느 날 인민군이 이 마을을 점령한다. 이 와중에 친삼촌(이대근)은 인민군에 협조하다 국군의 진격으로 가까운 산속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고, 외삼촌은 숨어 있다가 국군으로 입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삼촌의 전사통지서가 온다. 외할머니는 격분한 나머지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치는 날 그 번갯불로 앞산에 숨어 있는 빨치산들을 모두 지져버려달라고 악을 쓰며 저주한다. 그 소리를 듣고 친할머니가 안방을 박차고 나와 소리소리 지르며 말싸움이 시작된다. 이윽고 격앙된 친할머니는 며느리까지 내쫓겠다고 악을 쓴다. 동만어머니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사이에서 고초를 당해야 하고 철없는 동만이는 어른들이 왜 싸우는지 알 리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친삼촌이 몰래 집을 찾아왔었는데, 그뒤 동만은 낯선 남자에게 삼촌이 야밤에 집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멋모르고 발설하는 바람에 아버지(김석훈)가 형사에 잡혀가 고초를 겪는 사건이 벌어진다. 동만은 더욱 친할머니의 미움을 사면서 일체 밖에 나가지 못하게 엄명을 받는다.

이 무렵 빨치산들이 가까운 읍내를 습격하여 전원이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동만이 아버지는 삼촌이 죽었을 것이라 단정하지만 친할머니는 이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점쟁이를 찾아간 친할머니는 아들이 생존해 있다는 확언과 아들이 언제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까지 들은 것이다.

할머니는 점쟁이가 일러준 날에 푸짐한 음식과 불을 밝혀 기다렸으나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다음날 새벽이 다 되어서야 구렁이 한 마리가 집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나라 무속신앙인 죽은 자의 영혼이 구렁이 속으로 옮겨와 마지막 집을 들러본다는 속설에 따라 외할머니는 구렁이를 삼촌의 혼령으로 믿고 여러 의식으로 기도하며 좋은 곳으로 승천하라고 정중히 빌며 내보낸다.

이 작품의 무대는 경북 안동 근방의 큰 기와집들이 많은 보존마을로 잡았다. 장마철에 맞추어 촬영했기 때문에 21일 만에 끝낼 수가 있었다. 느린 감독이란 오명을 벗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원작소설은 장마철의 농촌 분위기를 세밀하게 묘사한 부분이 많은 것이 특색이었는데 그런 분위기를 살리려 애쓰다보니 영화는 2시간10분이 되었다. 제작자가 1시간50분 이내로 줄여달라고 해서 약 20분을 잘라야 하는 아픔이 있었다. 장마철 촬영이라 해도 빗줄기의 일관성을 위해 어려운 소방차를 한두대 빌려야 했다. 구렁이 촬영은 20분 분량을 촬영해 편집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뉴욕, 파리, 스위스 등에서 상영돼 우리 고유의 무속과 분단의 아픔에 대한 큰 관심을 끌어냈다. 79년 대종상에서 우수작품상과 촬영상을 수상했다.

유현목|영화감독·1925년생·<오발탄> <막차로 온 손님들> 등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