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이 자라 어른이 되기까지에는 어떤 힘들이 작용하는 것일까? 현대 생물학은 유전자가 개체 성장의 비밀을 쥐고 있다고 말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의 성장이 유전정보만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성장은 드라마가 아니라 이미 결정돼 있는 것의 따분한 운명적 전개에 불과하다. 우리가 ‘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예술의 천재들, 탁월한 인생을 전개한 개인들의 삶은 인생이 생물학적 운명의 단순 전개가 아니라 그 운명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유전적 결함과의 싸움이 아니었다면 베토벤,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헬렌 켈러는 없었을 것이고 인간 창조성의 보물창고는 한없이 초라해졌을 것이다. 미래사회는 개체의 유전적 결함을 제거하는 데 막대한 정성을 쏟게 되겠지만, 그러나 잊지 말지어다, 인간적 위대성은 어떤 완전성의 결과이기보다는 오히려 결함의 결과라는 사실을.
사람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 모든 성장의 서사(Bildungsroman)가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그들을 키운 비생물학적 비밀의 단서들이 거기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우리의 어떤 시인은 노래했지만, 이 ‘바람’은 그냥 바람이 아니라 우리네 유소년기의 모호하면서도 선명한 이미지들이 묻힌 깊은 지층, 풍요로운 의미들의 잉여영역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태어났을 때의 논두렁 개구리 울음소리, 흐드러진 복사꽃, 동네 바보의 언어, 불타는 노을, 골목의 달빛이 들어 있다. 거기에는 미친 여자, 귀신 나오는 집, 밤길의 공동묘지, 우리를 가슴 설레게 한 최초의 성취, 최초의 거짓말, 최초의 상실과 이별과 상처, 영광과 수치의 순간들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키운 그 비밀스런 ‘바람’의 목록을 이룬다. 이 바람은 유전자 장부에는 들어 있지 않고 그것의 비밀은 유전자 독법으로 해독되지 않는다.
최근 미국의 주요 신문들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쓴 <해뜨기 전의 한 시간>(An Hour Before Daylight)이라는 제목의 소년 시절 회고록에 대한 서평들을 열심히 싣고 있다. 남부 조지아의 한 시골 소년을 대통령이 되게 한 바람은 무엇일까? 소년 카터는 근세 미국사의 가장 어둡고 힘들었던 시기에 가난한 시골 농장에서 온갖 농장일을 하며 자란다. 그러나 소년기를 되돌아보는 그의 눈길은 따스하다. 땅에 대한 그의 사랑과 신뢰는 감동적이다. 흙이 좋아 노상 맨발로 뛰어다니고 맨발로 진흙 속을 걷기 좋아하던 소년, 농가 소출을 줄이라는 정부 지시 때문에 다 자란 땅콩밭을 갈아엎으며 울던 아이, 책읽기를 좋아하고 (어머니의 영향) 아버지에게, 그리고 세상에 뭔가 도움이 될 일을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소년- 그가 어린 시절의 카터이다. 한번은 새로 이사할 집을 구경하러 갔다가 아버지가 열쇠를 갖고 오지 않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아버지는 간신히 반쪽만 열리는 창문 틈으로 카터를 들여보내 안에서 문을 따게 한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쓸모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으로 소년의 가슴은 뛴다. 그가 네살 때의 일이다.
근년의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 흑인에 대해 가장 동정적이었고 흑백 인종문제에 관한 한 가장 훌륭한 정책들을 편 것은 린든 비 존슨, 지미 카터, 빌 클린턴이라는 것이 미국 언론들의 일반적 평가이다. 이 때문에, 흑백 분리의 역사적 뿌리가 깊은 남부 조지아에서 어떻게 흑인에 동정적인 대통령이 나올 수 있었는가도 많은 사람들을 궁금하게 하는 카터의 비밀 가운데 하나이다(우연찮게도, 존슨과 클린턴도 남부 출신이다). 그 비밀을 풀어줄 열쇠 역시 카터를 키운 소년 시절의 바람 속에 있다. 흑인 소작농들의 집에 무시로 드나들며 같이 먹고 자고 흑인 아이들과 뛰놀며 자란 것이 그의 소년시대이다. 그 무구했던 아이들이 자라면서 흑백분리의 사회질서와 위계서열을 알게 되고 그를 대하는 흑인 아이들의 태도도 달라진다. 그것은 아이들 사이의 “평등이 사라지고” 흑인은 흑인, 백인은 백인으로 나눠지는 인간분할의 순간이다. 그 분할은 소년 카터를 슬프게 한다(이 대목은 포크너의 어떤 소설에서 한 백인 소년이 흑백분리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면서 경험하는 ‘슬픔과 수치’를 생각나게 한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한국에 흑인은 없지만 인간분할은 우리 사회의 슬픔과 수치이다. “이방인을 너희들 중의 하나처럼 대접하라. 너희는 그의 가슴을 알고 있다. 너희도 이집트에서 노예였으므로”라고 히브리 경전 <레위기>의 한 대목은 말한다. 타자를 향해 열릴 줄 아는 가슴은 어린 시절에 만들어진다. 성장의 비밀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jidoh@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