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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권] 월드스타? 블록버스터 감독? 그런 욕심 버려야 평화로워진다
이주현 사진 최성열 2010-10-04

<방가? 방가!>로 첫 주연 맡은 김인권

신인이 아니고서 배우의 겸손은 그 진정성을 의심하게 될 때가 많다. 김인권의 경우는 어떨까. 1999년 <송어>로 배우 데뷔하고 10년이 넘은 시간. 그의 출연작은 두손으로 다 꼽지 못할 정도가 됐다. <아나키스트> <조폭 마누라> <말죽거리 잔혹사> <신부수업> <숙명> <해운대> <시크릿> <이웃집 남자> 등 그는 출연하는 작품마다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쳐 주연배우들을 긴장시켰다. 이젠 ‘빛나는 조연’이라는 수식어를 떼야 할 것 같다. <방가? 방가!>에서 김인권은 단독으로 110분의 러닝타임을 책임진다. 취업이 되지 않아 부탄 사람으로 위장해 공장에 위장 취업하는 한국인 방태식이 그가 맡은 인물이다. 김인권은 태닝 티슈와 5시간이 걸린 파마, 아랍인들이 종교의식 때 쓴다는 손잡이 없는 뚜껑처럼 생긴 모자를 통해 부탄 사람으로 완벽하게 위장한다. 진짜 볼거리는 그의 버라이어티한 연기다. 그는 연기로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김인권은 첫 주연작으로 받게 될 칭찬의 말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듯 불안한 마음을 내비쳤다. “흥행 결과에 따라 티켓 파워가 없는 배우라는 게 대대적으로 홍보될 수 있지 않나. 영화의 결과가 좋으면 떳떳하게 조·단역 연기를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창피하게 다시 조·단역 연기를 해야 한다. 행복한 상황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청바지에 배낭을 메고 스튜디오로 들어와, 배낭에서 구두와 벨트를 꺼내 사진 촬영용 옷을 갈아입던 김인권. 그는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모든 게 변함없는, 데뷔 11년차 배우였다.

-<방가? 방가!>로 인터뷰 하랴, 조범구 감독의 <> 촬영하랴, 요즘 정신없겠다. =어제도 <>을 찍었는데 거기 가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 강제규 감독의 <마이 웨이>도 지금 촬영 들어가기 전 군사훈련 중이다.

-그래도 바쁜 게 좋은 거다. =그렇지. 아직도 불안불안하다. 여러 작품 하다가도 하나가 잘못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지.

-<방가? 방가!> 개봉 앞둔 기분은 어떤가? 첫 단독 주연작이라 다른 작품 개봉 때와는 기분이 사뭇 다를 것 같다. =조·단역 할 때는 무대 인사 따라다니면서 가끔 인터뷰 잡히면 ‘감사합니다’ 하면서 기분 좋게 하면 되는데, 이젠 어깨가 무겁다고 할까. 예전엔 하고 싶은 말은 막 했는데 이젠 말도 조심하게 되고. 관객을 직접 만나고, 관객의 평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니까 부담이 된다.

-<방가? 방가!>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촬영 2주 전에 시나리오가 메일로 왔다. 굉장히 급하게 구하더라. (웃음) 나한테 주인공이 들어올 리 없는데 주인공 역이라고 시나리오가 왔다. 그리고 시나리오 크레딧 보니 어, 육상효 감독님? 육상효 감독님이면 시나리오 잘 쓰시는 분인데. 읽어보니 오, 재밌네,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고. 내가 주인공 맞아? 설마. 일단 감독님 만나러 가보자 해서 만나뵀고, 다음날 캐스팅이 결정났다. 리딩하러 갔더니 캐스팅이 나 빼고 이미 다 돼 있는 상황이더라.

-나에게 들어올 수 있는 시나리오였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나. =전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시나리오다. 그래도 이런 건 있었다. 언젠가는 극장에 내 얼굴이 크게 걸렸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빨리 이뤄질지는 몰랐다. 그런 날이 왔으면, 하고 기도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시나리오를 받았고, 2주 안에 촬영에 들어갔고, 오늘 대한극장에 가보니 내 얼굴이 큼직하게 나온 포스터가 걸려 있더라. 어리둥절하다.

-<해운대> 이후 시나리오를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제작 단계까지 가지 못한 게 좀 있다. <> 하기 전에는 이현승 감독님과 작품을 하려 했다. 그러다 윤제균 감독님 제작사에서 이민기, 강예원, 김인권의 <해운대> 사단 데리고 <>한다니까 이현승 감독님이 “가라, 가. 너 키워준 사람인데 윤제균한테 가라” 그랬다.

-데뷔작 <송어> 때 캐릭터 분석만 50페이지가량 했었다고. 이번엔 주인공이니 캐릭터 분석 엄청 했겠다. =<송어>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했다. 육상효 감독님이 교수님이어서 그런지 충무로에 오래 계신 분들 특유의 근성 같은 게 없다. 학생처럼 감독님한테 계속 질문 던지면 감독님도 즐거워하셨다. 사실 내가 준비한 설정은 많이 포기했다. (김)정태 형도, 나도 고향이 부산이라 경상도 사람으로 설정하고 경상도 사투리 쓰면 어떨까 했더니 감독님은 “나는 우리 엄마한테 이렇게 말해”하며 아쉬워하더라. 그래서 방가(방태식)는 충남 금산 사람이 됐다. 집에서 <짝패> <거북이 달린다> 틀어놓고 충청도 사투리를 익혔고, 감독님한테 충청도 욕, ‘엄동설한 동치미 독에 담가불라’ 이런 욕도 배웠다. 감독님의 페르소나가 되고자 했다. 감독님이 가지고 있는 엄마에 대한 정서, 친구에 대한 정서를 그대로 카피했다. 그 다음 리얼리티는 내가 어떻게든 획득하려 했다.

-부탄 사람으로 위장한 한국 사람은 대체 어떤 말투일까, 고민 많았겠다. =부탄 사람이 되어야겠다기보다 동남아 사람인 척하는 충남 금산 백수의 모습은 어떨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반두비>나 <로니를 찾아서>를 찾아봤다. 가장 좋은 건 같이 연기하는 동남아 배우들의 대사를 듣는 거였다. 그러면서 말투를 흉내냈고, 정서를 표현하려 했다. 그래서 약간 극단적이기는 하나, 한국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표현됐다.

-이주노동자들 앞에서 욕 강의를 하는 장면은 참 리얼했다. 선생님 해도 되겠더라. =정태 형이 노래방에서 트로트 <찬찬찬> 강의하는 연기를 워낙 잘해서 웃음이 빵빵 터졌다. 정태 형의 트로트 강의랑 내 욕 강의가 일종의 대립 구도인데, 정태 형만큼의 에너지는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싶었다. 연기하면서는 울컥 했다. 슬퍼서 풀밭에 가서 울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욕을 배워서 귀 열고 들으라는 거잖나. 한국인들이 이주노동자 친구들에게 얼마나 욕을 많이 하면 하는 생각을 하니까 슬프더라.

-평범한 표정과 평범한 연기에도 참 다양한 결을 담아 표현해내는 것 같다. =난 내 연기가… 음악으로 비유하면 선율이 잘 흘러가야 하는데 내 연기를 보면 선율이 중간중간 툭툭 끊기는 것 같다. 라라라하다가 툭. 사기꾼이 사기를 치는데 살짝 눈빛이 돌아간 게 들키는 순간 같은 거. 완벽하게 그 인물인 척해야 하는데 들키는 순간이 있다. 관객은 알아차린다. 어느 부분이라고 집어내지 못할 뿐이지 관객은 분명 이상하다는 걸 안다. 절대음감 가진 사람은 여기서 반음 틀렸다는 걸 집어낼 테고. 감정이 튀는 부분을 자연스럽게 연기하려고 별의별 걸 다 가져다 쓴다. 멍하니 있는 것도, 지문에 없는 내용을 채우려고 그 흐름에 맞는 다른 생각을 가져다 쓰면서 연기하고.

-<방가? 방가!>에서 스스로 연기가 튄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뭔가. =<한오백년> 부르는 장면. 이게 너무 극단적이다. 부탄 사람인 척하고 있는데 금광고등학교 나온 방태식 아니냐고 지나가던 사람이 아는 척했을 때, 티 안 내려고 했던 장면. 그렇게까지 거북하게 소화 안 해도 되는데…. 그건 내가 느껴보지 못한 리얼리티니까. 동남아 친구들 앞에서 부탄 노래를 불러주는 데서도 차라리 ‘알라숑, 깔라숑’ 이러면 되는데 <한오백년>에다가 ‘숑’을 붙이니까 어휴.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아쉬운 게 한도 끝도 없다.

-장르영화 안에서도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당신의 연기 스타일을 생각하면 이번 영화에서 극단적인 코미디 연기를 하느라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로 보면 진짜 웃기지. 하지만 현실에선 확 비약이 생기니까. 난 그런 연기가 안된다. 참 나도 문제인데, 허용하고 연기하면 되는데 그게 안된다.

-연출을 해서인지 연기하면서도 연출가의 마인드를 가지고 연기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그렇다. 그래도 감독님이 있는데, 내 역할을 넘어서 얘기하면 안되겠구나 반성했다. 결국 감독님 얘기하는 게 맞다. 방가 캐릭터를 살리려다가 감독님이 보고 있는 큰 그림을 망치면 안되잖나. 너무 리얼리티에 집착하는 것도 잘못이다.

-대학 졸업작품 <쉬브스키> 이후 연출은 안 하고 있다. 연출 계획을 물어보는 질문에 아직 배울 게 더 많다는 얘기를 자주 하더라. 실질적인 준비는 아니더라도 마음의 준비는 계속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윤제균 감독님은 당장 내년이나 내후년에 입봉하자 하고, 김성수 감독님은 내가 군 제대할 때부터 시놉시스 가져오라 했다. 영화사랑 미팅도 하게 하고, PD랑 작가 붙여주려 하고. 주위에서 자꾸만 하라고 그런다. 지금은 너무 배우의 길쪽으로 와버려서 이야기가 안 떠오른다. 지금 내가 연기하고 있는 인물 하나 만드는 게 더 급한 것 같다. 내가 만약 감독이 된다면 캐릭터 코미디를 하지 않을까 싶다. 주성치나 성룡의 영화처럼 캐릭터를 내세우는 형태의 영화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아직은 감독할 생각 없다. 대학 다닐 때는 이야기가 막 떠올랐는데 지금은 하나도 안 떠오른다.

-영화적 취향은 어떤 쪽인가. =난 진짜 캐릭터 코미디가 좋다. 짐 캐리 영화도 좋아하고. TV드라마는 안 봐도 <개그콘서트>는 꼭 챙겨본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면 멋있는 사람들 보면서 대리만족할 텐데, 자부심이 부족해서 그런지 못난 사람들 나와서 그들이 웃기는 거 보면 위안이 된다. 악취미이긴 한데, 그게 좋다.

-중학생 때 교회에서 연극하며 코미디 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교회에서 연극할 때 말도 안되는 코미디 연기를 했는데 사람들이 웃어줬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고민하면서 ‘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 꼬꼬댁~’ 이러면 사람들이 웃었다. 진지한 연기도 했다. 그러면 관객이 막 울고. 그때 목사님이 대학로까지 진출시켜주겠다고 열심히 연기해보라고 했다. 그땐 등교하기 전에 아침 6시까지 교회에 모여 친구들이랑 연극 연습하다가 학교 가서 수업 받고, 끝나면 다시 교회 가서 연극 연습하고, 그렇게 놀았다. 그러다 대학 갔을 때는 사실상 연극이 재미없었다. 그때는 생계형 배우로…. 이 계통 안에서 뭔가 하고 싶은데, 연출부를 하다 보니 연기에 재능이 보여서 <송어>를 하게 됐다. <송어> 현장에선 연기하면서도 의자 나르고, 조명기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카메라 렌즈는 몇 mm 쓰는지, 나름 연출할 거란 생각에 그런 거 일일이 적고 그랬다.

-증조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어릴 때 또래보다 조숙했나. =증조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우리 둘째 애가 그렇다. 아기 봐주시는 할머니가 낮에 잠깐씩 둘째를 봐주셨는데, 둘째가 첫째보다 조숙한 면이 있더라. 자기가 아빠를 웃기기도 하고. 난 할머니보다 더 할머니 손에서 자랐으니까 그런 면이 있지 않을까.

-딸들이 몇살인가. =첫째가 다섯살, 둘째가 세살. 지금 뱃속에 하나 더 있다. 오늘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이제 7주 정도 됐다.

-아이가 자라면 내 연기를 볼 텐데, 하는 생각을 할 것 같다. =그래서 너무 잔인한 거, 처절한 건 못하겠더라. 또 그런 연기하면 내 정서가 애들한테 영향을 미칠까봐, 묻을까봐 걱정도 되고.

-배우로서의 욕심은 뭔가. =욕심은 버려야 한다. 버리지 않으면 힘들어진다. 이젠 힘든 게 싫다. 평화롭고 싶다. 욕심이 하나 있다면 평온한 마음으로 일하고 싶다는 거. 아등바등 스트레스 받으면서 까칠해지고 싶지 않다. 욕심은 한도 끝도 없겠지. 월드 스타 되고 싶지, 나도 이병헌 되고 싶고, 장동건 되고 싶다. 욕심이야 뭐, 300억원짜리 작품 연출하는 대감독이 되고 싶지. 그래도 욕심은 비우려 한다. 욕심 때문에 스트레스가 생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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