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 현대미술전
카를로스 콜롬비노,
10월31일까지/롯데갤러리 본점/02-726-4428
“견고하다고 믿고 밟고 서 있는 이 땅이 갑자기 물렁물렁해지고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할 때 느끼는 당혹감은 정말 아찔하다.”
‘마술적 사실주의’로 유명한 <보르헤스 문학전기>의 한 구절이다. 라틴아메리카 출신 화가들의 작품을 볼 때마다 이 문장이 생각난다. 마치 민족적으로 내재된 유전자처럼 라틴아메리카의 예술가들은 사실을 사실 같지 않게 작품에 담아내는 재주가 있다.
<라틴아메리카 현대미술전>은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눈이 몽롱해지는 전시다. 자국에서 거장으로 손꼽히는 페르난도 보테로(콜롬비아), 카를로스 콜롬비노(파라과이), 이그나시오 이투리아(우루과이)의 (국내) 미공개작이 소개되는데다 새롭게 발굴돼 주목받고 있는 라틴의 젊은 작가들- 오스발도 에레라 그라함, 페르난도 토레스, 모니카 사르미엔토 등 9명- 의 작품 70여점을 모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눈길이 먼저 가는 건 ‘빅3’의 작품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대규모 전시를 연 페르난도 보테로의 매력은 여전하다. 풍만하고 당당한 표정의 인물들이 화폭을 가득 채운 가운데 <여자>라는 제목의 작품처럼 좀더 힘을 빼고 채색한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보테로는 원색을 즐겨 쓰기로도 유명하다). 이그나시오 이투리아의 작품은 보테로의 작품과 비교해서 보면 재미있다. 보테로의 인물들이 거인국에 산다면 이투리아의 인물들은 소인국에 산다. 화장실 세면대에 걸터앉고 식탁 위 접시에 풍덩 빠져 있는 ‘미니미스러운’ 작품과 두껍게 덧바른 듯한 채색감이 이투리아 그림의 묘미다. 한편 카를로스 콜롬비노의 그림은 다른 두 작가에 비해 서정적이다. 구두, 장미, 나무 등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소재를 주로 다루지만 묵직한 컬러와 선굵은 곡선이 어떤 울림을 준다.
라틴아메리카 미술이 21세기 들어 새롭게 조명되는 건 그동안 유럽 평론가들로부터 “서유럽의 모더니즘에서 파생되었다”는 평가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비록 재평가를 받고 있고 살사, 탱고의 유행과 더불어 국내에도 라틴 화가들의 작품이 자주 소개되고 있지만 국가별 작품을 한자리에서 관람하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다. 보테로-이투리아-콜롬비노의 작품을 기반으로 신예 라틴 화가들의 작품이 어떤 흐름을 이루고 있는지 살펴보면 좋을 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