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많은 일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란 게 뭔지 끝내 알 수는 없겠지만…."
홍상수 감독의 11번째 장편영화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가 내뱉는 내레이션의 일부다.
옥희의 말처럼 사람들 대부분은 쳇바퀴 구르듯 반복된 일상을 살아간다. 일을 하고 밥을 먹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잠을 잔다. 하지만, 어제는 오늘과 같지 않다. 아니 비슷한 듯 다르다. 그리고 각론으로 들어갈수록 다른 점이 많은 법이다.
홍상수 감독은 비슷한 듯 다른 일상을 조명하는데 뛰어난 재주를 보여왔다. 그는 카메라를 마치 돋보기처럼 활용한다. 미세한 일상의 차이를 큼지막한 돋보기로 확대해 보여준다는 점에서다.
'옥희의 영화'도 전작들처럼 일상에 천착한다. 연애이야기가 화두이고 술자리가 등장하며 유머도 풍부하지만, 전작들에 비해 남자들의 치졸한 행동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끈적끈적한 대사들도 많지 않다.
영화를 보는 내내 웃기지만 보고 나면 쓸쓸해진다. 전작 '하하하'도 비슷한 느낌이 들지만 '옥희의 영화'는 그 강도가 훨씬 세다. '하하하'가 삶의 쓸쓸함을 유머로 교묘히 숨기고 있다면 '옥희의 영화'는 삶의 건조함과 스산함을 전면에 내세우는 탓이다.
영화는 '주문을 외운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라는 4편의 단편으로 이뤄져 있다. 영화감독과 교수를 오가는 송 교수(문성근), 대학생 옥희(정유미)와 진구(이선균)가 각 에피소드를 책임지고 이끌어 간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독립돼 있으면서도 느슨하게 연결돼 있다. 옥희가 송 교수와 진구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다는 기본 설정은 유지해 나간다.
각 에피소드는 저마다 독특한 재미를 주지만 가장 심란한 영화는 '폭설 후'다.
송 감독은 생활비 때문에 시간강사 생활을 한다. 하지만 폭설 때문에 계절학기 강좌에 온 이는 아무도 없다. 학생들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낀 송 감독은 동료에게 다음 학기부터는 강의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던 중 옥희와 진구가 시간차를 두고 강의실에 나타난다. 이들 셋은 인생에 대해서 논한다. 대화를 나누다 우울해진 송 감독은 홀로 낙지를 먹고 결국 골목길에서 먹은 걸 토하고 만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의 문답처럼 철학적인 말이 오고 가는데 그 대사를 음미하며 따라가도 좋을 것 같다.
"살면서 중요한 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는 "살면서 중요한 것 중 내가 '왜 하느냐'를 알면서 하는 건 없다"는 대답이, "사랑을 꼭 해야 되요?"라는 질문에는 "사랑 절대로 하지마.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 버텨봐. 하지만 뭔가 결국 사랑하고 있을 걸…."이라는 답이 오간다.
배우들의 연기는 섬세하다. 특히 문성근은 아주 미세하게 패턴을 바꿔가며 송 교수와 송 감독을 오간다. 비슷한 사람인 것 같은데 전혀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다. 홍상수 영화의 단골손님인 정유미의 연기는 이제 자연스럽게 홍 감독의 영화와 조화된 듯 보이고 이선균의 연기도 무난하다.
음악은 단순하지만 각 에피소드의 분위기를 살려주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됐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시작하고 끝날 때마다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흐른다. 하지만 각 에피소드가 주는 분위기에 따라 행진곡의 분위기는 많이 바뀐다.
'키스왕'에서 옥희를 짝사랑하던 진구가 마침내 옥희와 육체관계를 맺고 난 후 흐르는 '위풍당당 행진곡'은 우리가 흔히 아는 행진곡 풍.
하지만 '폭설 후'에서 시간강사 직을 그만두기로 작심한 송 감독이 눈 덮인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갈 때는 같은 곡인가 귀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애잔한 피아노 연주가 스크린을 채운다.
아내의 옛 남자가 누굴까 떠올리면서 "말도 안돼"라고 코웃음 치면서도 결국 쓸쓸하게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심리를 표현한 '주문을 외운 날', 두 남자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옥희의 이야기를 담은 '옥희의 영화'도 쓸쓸함을 자아낸다.
제6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부문 초청작이다.
9월16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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