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지금의 스리랑카에 해당하는 실론 왕국에는 지아페르라는 왕이 있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왕은 나라의 가장 뛰어난 학자들에게 세 왕자의 교육을 맡겼고, 이들은 타고난 총명함으로 후계자 수업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그 뒤 왕은 세 왕자를 불러 자기는 은퇴하여 명상의 삶으로 들어가고 싶으니 대신 이 나라를 맡으라고 말한다. 왕자들은 현명한 겸손함으로 자신들은 아직 멀었다고 거절한다. 왕은 내심 기쁘면서도 짐짓 화를 내며 이들을 나라 밖으로 내쫓는다. 이들의 이론적 지혜에 풍부한 경험을 더해주기 위한 배려였다.
방랑을 하던 왕자들은 우연히 길에서 낙타가 지나간 흔적을 보게 된다. 여러 흔적을 근거로 세 왕자는 그 낙타가 한눈이 멀었고, 이가 빠졌으며, 한쪽 다리는 마비되고, 한쪽 옆구리엔 꿀단지, 다른 쪽에는 버터단지, 등에는 임신한 여인을 태우고 있었다고 결론 짓는다. 그 뒤 세 왕자는 그 낙타를 잃어버린 상인과 마주친다. 상인에게 그 얘기를 해주자, 상인은 왕자들이 낙타를 훔쳐간 범인이라 단정한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낙타를 그렇게 잘 묘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고소를 당한 세 왕자는 결국 베라모 황제의 궁정으로 끌려간다.
심문하는 황제 앞에서 왕자들은 해명한다. ‘저편의 싱싱한 풀을 놔두고 이편의 덜 푸른 풀만 먹었으니 한눈이 멀었고, 발자국 옆의 질질 끌린 자국으로 보아 한 다리가 마비되었을 것이다. 뜯긴 풀이 고르지 못하니 이가 성하지 않고, 길 한쪽엔 개미가, 다른 쪽에 파리가 몰려 있는 것으로 보아 옆구리 양쪽에 꿀단지와 버터 단지를 달고 있었을 것이다. 또 사람의 발자국 옆의 축축한 흙의 냄새를 맡을 때 성욕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여자의 오줌으로 보이고, 그 옆에 손바닥 자국이 있는 것은 여인의 몸이 무거운 상태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멍청한 이야기’라고?
결국 잃어버렸던 낙타는 사막에서 헤매고 있는 상태로 발견되고, 왕제는 총명한 세 왕자를 자신의 고문으로 임명한다. 전형적인 해피엔딩이다. 이 얘기를 꺼낸 것은 이 페르시아의 전설에서 과학의 중요한 개념이 비롯됐기 때문이다.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실론을 ‘사란딥’(Sarandip)이라 불렀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개념이다. 이 낱말의 창시자는 영국 소설가 호레이스 월폴(1717∼97)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 개념을 사용하면서 그것이 <세렌딥의 세 왕자>라는 “멍청한 이야기”에서 유래한다고 썼다.
“그들은 항상 우연과 총명함의 힘으로 그들이 찾으려 하지 않았던 발견들을 해낸다.” 세렌디피티란 연구 과정에서 애초에 의도하지 않은, 그러나 매우 귀중한 발견을 우연히 해내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과학적 발견이 합리적 절차에 따른 필연적 과정의 결과라 믿으나, 상당수의 과학적 발견은 실은 우연의 소산이다. 당장 떠오르는 예는 연금술. 연금술사들은 금의 제조법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 그들이 그 과정에서 만들어낸 것은 근대적 화학이었다. 중국의 연단술사들 역시 불로장생의 약을 찾으려다 엉뚱하게 화약을 발명하고 말았다.
과학사의 가장 오래된 예는 아마 아르키메데스의 발견일 것이다. 그가 목욕을 하다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는 얼마나 기뻤던지 “유레카!”라 외치며 알몸으로 거리로 뛰어나왔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얘기다. 알렉산더 플레밍은 소독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배양하던 박테리아를 오염시켰지만, 그 대신 박테리아를 죽이는 푸른곰팡이(페니실륨)를 우연히 발견했다. 루이기 갈바니는 개구리 해부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생전기(bioelectricity)를 발견하여 현대 생화학의 토대를 놓는다. 그전까지만 해도 신경은 액체가 흐르는 관으로 여겨졌었다.
사실과 허구의 교차점
도박의 도시로 알려진 라스베이거스에서는 해마다 미국실험생물학연합회(FASEB)의 연례 회의가 열린다. 노벨상 수상자 살바도르 루리아는 거기에 참여하려 왔다가 슬롯머신에 빠진 동료의 어리석음을 비웃다가 동료가 몇번의 베팅 끝에 잭팟을 터뜨리자 심히 머쓱해진다. 이를 계기로 그는 슬롯머신의 수리에 대해 생각하다가 불현듯 슬롯머신과 박테리아의 돌연변이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유비로부터 그는 결국 내성균이 살균 박테리아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자발적 돌연변이에 의해 발생한다는 중요한 발견에 도달한다.
과학의 결정적 발견이 순수한 우연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연역이나 귀납이라는 합리적 절차에 익숙한 과학자들에게 불편함을 준다. 사실 루리아가 그 발견에 이르게 된 진정한 과정은 과학논문에 실릴 수 없다. 논문에서는 문제의 출발에서 발견된 사실에 도달하는 모든 과정이 오로지 과학적, 합리적 절차에 따라서만 이루어진 것처럼 기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논문의 작성은 그 유명한 파스퇴르의 격률에 따라 이루어진다. “모든 것을 필연적인 것(inevitable)처럼 보이게 하라.” 문제는 그 발견이 실제론 필연적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존 내쉬는 동료들이 여학생을 유혹하는 것을 보고 ‘내쉬 균형’의 원리를 생각해낸다. 하지만 이 비결(?)을 논문에 쓸 수는 없는 일. 그것은 일화, 즉 숨은 이야기로서 허구의 영역(가령 영화, 소설, 전기)으로 들어갈 뿐이다. 여기서 묘한 역설이 발생한다. 발견에 이른 진짜 과정을 전기의 영역으로 보내놨으니, 정작 논문에서는 가짜 과정을 창작해낼 수밖에 없잖은가. 이로써 늘 허구와 뒤섞이게 마련인 일화가 사실의 기록이 되고, 사실을 담아야 할 논문은 졸지에 우연을 필연으로 둔갑시키는 허구(SF?)가 된다.
과학적 방법은 반복성, 재연성을 갖는다. 하지만 세렌디피티는 반복 가능하지도, 재연 가능하지도 않다. 한 과학자의 발견을 이끈 우연을 그대로 재연한다고 다른 과학자들 역시 다른 위대한 발견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우연’이나 ‘영감’은 본디 과학적 방법론에 속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과학의 ‘타자’로, 과학의 세계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과학논문이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배신하고, 제 출생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세렌디피티의 존재가 그저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 과학의 정상적 상태에 속한다면 어떨까?
우연에 기회를
발견이 언제나 합리적 추론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려 위대한 발견일수록 필연을 넘어선 우연, 혹은 논리를 넘어선 영감의 산물일 때가 많다(물론 그 우연도 오직 ‘준비된’ 사람에게만 영감으로 작용할 거다). 과학에서 우연의 역할은 적어도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더 지대할 것이다. 이제까지 과학논문은 우연을 필연으로 위장해왔기 때문이다. 그 지대한 발견술적 기능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연은 과학적 방법론에서 배제되어왔다. 세렌디피티는 과학의 밖에 있으나 과학의 안으로 깊숙이 작용하고 있는 과학의 파레르곤이다.
영감이 종종 엉뚱한 데서 나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에서 “운율은 가르칠 수 있지만, 은유 만드는 법은 가르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은유란 서로 다른 두 사물 사이에서 급작스레 유사성을 발견하는 능력인데, 은유가 효과적이려면 그 두 사물이 가능한 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정보이론에서는 아마 이를 ‘정보량의 확장’이라 부를 것이다. 논리에는 ‘비약’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논리는 멀리 날아가지 못한다. 이때 정보량을 ‘비약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바로 우연, 즉 세렌디피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