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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놈, 비열한 놈, 그러나 웃긴 놈
장영엽 2010-09-14

3D 애니메이션 <슈퍼 배드>가 특별한 까닭

 얼마나 악독하기에. 지난 7월 미국에서 개봉한 뒤 언론의 호평과 <쿵푸팬더> <드래곤 길들이기>를 넘어서는 흥행 수익을 올린 3D애니메이션 <슈퍼 배드>가 9월16일 개봉한다. 제임스 본드 영화 속 악당들을 주인공으로 앉힌 뒤 픽사의 감성과 드림웍스의 위트를 버무려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스 에이지> 시리즈를 제작한 <슈퍼 배드>의 제작자 크리스 멜리단드리는 조금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악당은 영웅보다 매혹적인가? 적어도 2010년 할리우드 애니메이션계에서 이 물음은 정설처럼 받아들여질 듯하다. 못생기고 성격 더러운 초록색 괴물, 그러니까 슈렉이 드림웍스에 금광을 선사하며(<슈렉> 시리즈는 <토이 스토리> 시리즈와 더불어 미국 내 역대 애니메이션 흥행 성적에 두편(<슈렉2> <슈렉>)이나 이름을 올렸다) 승승장구한 이래, 그 어떤 애니메이션도 악당을 홀대하지 않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라. <토이 스토리3>는 버즈 일행의 탁아소 생활기를 다루면서도 그곳의 악당 루소와 빅 베이비에 대해 전사(前事)까지 설명하는 공을 들였다. ‘길들여야’ 했던 드래곤은 어떤가? <슈렉> 시리즈로 한밑천 챙긴 드림웍스는 또 다른 야심작으로 <메가마인드>를 준비 중인데, 이 애니메이션은 아예 영웅을 처단하고 슬럼프에 빠진 악당이 주인공이다. 유니버설이 제작하고 9월16일 개봉하는 <슈퍼 배드> 역시 이러한 애니메이션계의 트렌드와 무관하지 않은 작품이다. 아예 타이틀부터 ‘비열한 나’(Despicable Me, <슈퍼 배드>의 원제)라고 붙인 이 작품은 주인공인 악당 그루를 앞세워 그의 좌충우돌 범죄행각을 조명하는, 일종의 ‘하이스트 애니메이션’이다.

친근해! 제임스 본드의 적수를 닮은 악당들

<슈퍼 배드>는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누군가에 의해 도둑맞는 사건으로 포문을 연다. 악당이라고 하지만 기껏해야 스타벅스에 줄 선 사람들을 ‘얼음땡 건’으로 냉동시킨 뒤 새치기한다거나, 어린이의 풍선을 바늘로 터뜨리는 등의 소심한 범죄만 저지르던 그루는 TV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 뒤 한껏 고무된다. 경쟁심에 불타오르던 그루는 정체 모를 악당을 능가할 대형 범죄를 꿈꾸는데, 그건 바로 달을 훔치는 것이다. 그는 어떤 사물이든(그러니까 달마저도) 콩알만 한 크기로 작게 만드는 ‘축소광선 무기’를 손에 넣는 데 성공하지만, 그마저도 피라미드 절도 악당인 벡터에게 빼앗기고 만다. 다급해진 그루는 우연히 만난 세명의 고아 소녀를 이용해 벡터로부터 축소광선 무기를 되찾으려 한다.

<슈퍼 배드>를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면, 그건 제임스 본드다. 비록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애니메이션에 웃음을 주는 요소(총에서 오징어와 피라냐가 발사되는데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로 쓰이긴 했지만, 경쟁적으로 기발한 신종 무기를 꺼내놓는 그루와 벡터의 모습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등장하는 일련의 악당들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대머리에 음침한 인상의 그루는 <007 여왕폐하 대작전> <프롬 러시아 위드 러브> 등에 등장한 본드의 적수 블로펠드를 닮았다. <슈퍼 배드>의 제작진이 직접적으로 본드 시리즈와의 연관성을 밝힌 바는 없지만, 동유럽 악센트가 잔뜩 섞인 기묘한 영어를 구사하는 스티브 카렐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영락없이 폴란드 출신 악당이었던 블로펠드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면 말귀를 잘 못 알아들어 그루에게 종종 엉뚱한 무기를 제공하는 무기 개발자 네파리오 박사는? 물론 미스터 ‘Q’(제임스 본드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과학자)와 유사하다.

귀여워! 상상 속의 무기들과 엉뚱한 미니언들

이처럼 <슈퍼 배드>는 영화역사상 가장 매혹적인 스파이물의 형식과 아이템을 빌려 자신을 치장할 줄 안다. 이 애니메이션의 거의 모든 볼거리 또한 이러한 요소에서 나온다고 봐도 무방하다. 제작 단계부터 3D애니메이션으로 계획된 <슈퍼 배드>는 악당들의 신종 무기와 범죄행각, 더 좋은 무기를 차지하기 위해 쫓고 쫓기는 과정에서 3D의 진가를 발휘한다. 특히 눈앞으로 미사일이 날아오는 것만 같은 그루와 벡터의 공중 추격신, 실제로 놀이기구를 탈 때처럼 아찔하게 펼쳐지는 롤러코스터 질주장면이 인상적이다. 임팩트는 3D가 주지만, 화면을 감칠맛나게 장식하는 건 그루와 함께 수십명씩 등장하는 미니언들이다. 노란 알약 모양의 몸통에 웅얼거리는 말투의 이들은 <아이스 에이지>(<슈퍼 배드>의 제작자 크리스 멜리단드리는 <아이스 에이지> 시리즈의 제작자다)의 미친 다람쥐, 스크랫을 떠오르게 하는 감초 연기를 선보인다.

영화의 감성적인 파트를 담당하는 건 그루의 양녀가 된 고아 세 자매다. 마고, 에디트, 아그네스라는 이름의 이 소녀들은 이야기의 어두운 지점과 밝은 에피소드를 넘나들며 애니메이션이 볼거리에 치중되지 않도록 무게감을 잡아주는데, <슈퍼 배드>의 장점은 현란한 눈요기보다 이러한 감수성에 있는 듯하다.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성인 입장에서 전혀 웃으며 볼 수 없는 아슬아슬한 지점들이 있다. 이를테면 고아원에서 입양되길 간절히 바라며 밤마다 기도하는 세 자매의 모습이 그렇다. 네파리오 박사의 계략으로 파양되어 그루와 헤어지는 순간에도 자매들은 애써 눈앞에 닥친 비극을 부인하려 하는데, 이런 에피소드들이 양아빠 그루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특별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각색

물론 지금까지 언급한 <슈퍼 배드>의 요소들을 독창적이거나 신선하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악당들의 짓&#44419;음과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브랜드명(스타벅스, 닌텐도 등), 다소 시니컬한 유머들은 드림웍스의 <슈렉>를 떠올리게 하고, 괴팍한 악당과 소녀들이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감수성은 픽사의 장기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고 이 애니메이션을 드림웍스와 픽사의 성취를 지향하는 작품으로 짐작하는 건 오산이다. <슈퍼 배드>가 바라보는 지점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어린 관객층을 공략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토이 스토리> <업> <슈렉> <몬스터 주식회사> 등 드림웍스와 픽사를 지금의 위치로 키워낸 작품들은 대부분 순수한 동심을 어른의 세계로 데려오거나, 철저하게 성인 관객층을 염두에 두고 만든 애니메이션이었다. <슈퍼 배드>의 제작자 크리스 멜리단드리는 비슷한 전략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아이들에게 영감을 받았다. 아이들은 보통 영웅이 아닌 악당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을 더 좋아하더라.” 그는 아이들이 보고 싶은 악당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른들이나 보는 범죄영화의 공식과 익숙한 캐릭터들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각색했다. 때문에 <슈퍼 배드>에선 성인 관객이 보기엔 다소 낯간지러운 유머들과 전혀 무섭지 않은 악행들이 종종 눈에 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두고 ‘루니 툰스와 쿠키 케이퍼’(미국의 어린이 애니메이션 루니 툰스를 닮은 어린이 범죄영화)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애니메이션에 적확한 묘사다.

비록 프랜차이즈의 가능성을 쉽게 짐작할 수는 없지만, <슈퍼 배드>로 이룬 유니버설과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멜리단드리가 2008년 세운 신생 제작사)의 성취를 가볍게 볼 순 없을 것이다. <슈퍼 배드>는 미국에서만 2억3천만달러를 벌어들이며 <쿵푸 팬더>와 <드래곤 길들이기>의 미국 흥행 수익을 제쳤다. 이는 여전히 드림웍스와 픽사가 선점하지 못한 영역이 있으며, 새롭게 시장에 뛰어드는 이들이 얼마든지 돌파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선례로 보인다. 루나 툰스는, 그렇게 애니메이션 각축장에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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