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대화편 <파에드루스>. 글쓰기의 본질을 논하는 이 유명한 텍스트에서 소크라테스는 대화편에 이름을 준 청년, 즉 파에드루스와 대화를 나눈다. 도시의 더위를 피해 시원한 야외로 나간 두 사람은 산책을 하다가 일리수스라는 곳에 이른다. 파에드루스가 ‘전설에 따르면 이곳이 아테네의 왕녀(오리티아)가 북풍의 신(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니냐?’고 묻자, 소크라테스는 납치될 당시에 그녀가 ‘파르마키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노라고 대꾸한다. 소크라테스는 왜 이 말할 가치도 없는 사소한 사실을 굳이 언급하는가?
텍스트의 안과 밖, 그 경계를 허물다
데리다는 이를 우연으로 보지 않는다. ‘밖’에서 ‘안’으로 작용하는 액자(=파레르곤)처럼, 무관해 보이는 이 디테일이 실은 대화편(<파에드루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암시한다. 마침 일리수스에는 치유의 효능을 가진 샘이 있는데, 그 샘은 예로부터 ‘파르마키아’라 불렸다. 이 때문일까? 오늘날 약국의 문에는 ‘pharmacy’라 적혀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파르마키아’(φαρμακε?α)는 동시에 약을 제조하는 기술을 의미했다. 하지만 고대에 약을 조제하는 것은 종종 주술사의 일로 여겨졌기에, 그 말은 동시에 ‘사술’(邪術)을 가리키기도 했다.
‘파르마키아’는 그와 별 관계없는 ‘파르마코스’(φαρμακ??)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스에서는 기근이나 흉년과 같은 재앙이 있는 해에는 몇몇 사람을 폴리스 밖으로 끌어내 들판에서 돌로 쳐 죽이는 정화의식을 행했다. ‘파르마코스’는 그 의식의 희생양을 말한다. 파라마코스는 폴리스 밖에서 재앙의 원인이 된 이질적 요소를 안으로 끌어들인 자로 여겨졌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폴리스 밖으로 추방당하려면 파르마코스가 먼저 폴리스 안에 있어야 한다는 점. 한마디로 그는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는 자,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다.
‘파르마코스’라는 말 자체에도 이중성이 있다. 플라톤은 ‘파르마코스’(희생양)라는 말을 직접 사용한 적이 없다. 그가 사용한 것은 그저 ‘파르마키아(제약술)-파르마콘(약물)-파르마키우스(주술사)’라는 말뿐이다. 하지만 이 낱말의 연쇄는 청각연상에 따라 자연스레 ‘파르마코스’를 떠올리게 하고, 그로써 텍스트 ‘밖’의 파르마코스가 텍스트 ‘안’에 은밀히 간섭하게 된다. 아무리 자기 완결적인 텍스트라도 이렇게 해석은 밖을 향해 열려 있게 마련이다. <파에드루스>에서는 ‘파르마코스’라는 말이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파레르곤으로 기능한다.
파르마콘, 치유 혹은 독약
데리다가 주목하는 것은 ‘파르마콘’(φ?ρμακον)의 중의성이다. 그것은 이미 파르마키아의 이중성(‘제약’과 ‘사술’) 속에 예고되어 있다. 그리스어에서 ‘파르마콘’은 ‘치유’와 ‘독약’이라는 상반된 뜻을 갖는다. 번역자들은 문맥에 따라 이 말을 때로는 ‘치유’로, 때로는 ‘독약’으로 번역하곤 한다. 이 중첩이 어디 언어적 우연에 불과하겠는가? 약물은 제대로 사용하면 약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곧바로 독이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파르마콘’이 동시에 긍정성(‘약’)과 부정성(‘독’)을 띠는 것은 약물 자체의 이중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파에드루스>에서 파르마콘은 글쓰기의 은유다. 소크라테스가 소개하는 이집트의 신화에서 문자의 발명자 토트 신은 파라오 타무스 앞에서 문자의 효능을 자랑한다. “내 발명품은 기억과 지혜의 처방전(파르마콘)입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문자가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 것이라 나무란다. “그것은 기억의 치료가 아니라, 이미 발견한 것을 상기시키는 것에 불과해. 지혜에 관한 한, 그것으로 제자들에게 진리가 아닌 그것의 가상(억견)만 심어주게 될걸세.” 여기서 글쓰기는 지성의 파르마콘- 토트에게는 약, 타무스에게는 독- 으로 나타난다.
타무스는 플라톤주의의 화신이다. 파라오는 ‘말하는 주체’다. 말이 그의 적자라면, 글은 그를 잃은 고아다. 말은 늘 파라오와 붙어다니나, 글은 부재하는 파라오를 대리하기 때문이다. 말의 의미는 파라오의 존재 속에 현전(present)하나, 글의 의미는 그의 결핍을 통해 부재한다(absent). 글을 경계하는 플라톤의 시각에서 서구의 사유를 지배해온 ‘음성중심주의’, 혹은 ‘현전의 형이상학’을 볼 수 있다. 말과 글을 타무스와 토트, 부자(父子)에 비유한다면, 글은 위험하다. 그것은 말의 부재를, 아버지의 부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글은 부친살해자다.
데리다는 말을 글 위에 올려놓는 플라톤의 위계를 무너뜨린다. 말이나 글이나 어차피 기호. 어느 것도 현전(presence)에 이르지 못하다. 플라톤은 글을 가리켜 파르마콘(독)이라 불렀지만, 소피스트들은 외려 말이야말로 파르마콘(독)이라 본다. 문제는 늘 사물을 둘로 갈라놓고 거기에 위계를 설정하려 드는 사고의 버릇이다. 글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보존해야 할 것은 긍정과 부정의 가능성을 동시에 지닌 ‘파르마콘’ 자체, 즉 차이의 놀이를 통해 의미가 생성되는 장(場) 그 자체일 것이다.
플라톤은 가짜/진짜를 가르고 가짜를 솎아내려 한다. 하지만 파르마콘의 이중성이 암시하듯이, 그게 그리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이성(로고스)으로 신화(뮈토스)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는 그 자신도 주요한 지점에서 이집트의 신화를 논거로 들지 않던가. 신화를 독으로 보는 그도 어느 순간 그것을 약으로 활용한 셈이다. 한편,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공동체의 약으로, 소피스트를 공동체의 독으로 보았다. 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희극에서 소크라테스를 가차없이 소피스트의 범주 안에 집어넣는다.
여기서 극적 반전이 이루어진다. 플라톤은 가짜(시인, 논객)를 폴리스 밖으로 내쫓고, 소크라테스 같은 진짜(철인)에게 폴리스를 맡기려 했다. 하지만 정작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파르마키우스(φαρμακε??), 즉 사술을 펼치는 술사로 여겼다. 소크라테스는 결국 공동체 ‘안’에 해악을 들이는 자, 따라서 ‘밖’으로 추방되어야 할 자, 즉 파르마코스(희생양)가 되고 만다(텍스트 밖에 있던 ‘파르마코스’가 어느새 텍스트 안에 들어와 있음에 주목하라). 그리고 이 대목에서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파르마콘이 등장한다. 소크라테스의 독배!
진짜는 가짜로, 가짜는 진짜로
소크라테스는 폴리스를 위해 약(진리)을 조제했지만, 동료 시민들은 그것을 독(선동)으로 여겼다. 결국 그 자신이 조제한 파르마콘(약)이 글자 그대로 그의 마지막 잔을 채운 파르마콘(독)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파르마코스, 자기 철학의 순교자다. 플라톤주의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밖’에 있어야 마땅하나 ‘안’에 있는 자를 추방하려는 욕망, 세상을 ‘진짜’와 ‘가짜’로 가르고 가짜를 솎아내려는 충동은 플라톤 철학만큼이나 오래된 사유의 습관이다. 데리다는 수천년 묵은 그 정신의 고질병을 해체한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안과 밖의 구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뫼비우스 띠에서 안은 밖이 되고, 밖은 안이 된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삶이라는 이름의 무대에서 진짜는 가짜로 표변하고, 가짜는 진짜로 승화한다. 자신이 선이라 믿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하지만 파르마콘은 약이면서 동시에 독이다. 보존해야 할 것은 파르마콘의 이 이중성, 즉 약이 동시에 독일 수도 있다는 인식이다. 이는 자신이 선이라 굳게 믿을 때조차도 사유 속에서는 늘 제 위험성에 대한 각성을 유지해야 함을 의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