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하시 유이치, <오이란>(花魁), 1872년, 캔버스에 유채, 77x55cm, 도쿄예술대학미술관 소장
곱게 분칠한 얼굴 위로 우뚝 솟은 광대뼈와 세월의 주름이 보인다. 늘 절세가인이라 칭송받았고, 그렇게 그려졌을 초상화의 주인공이 그림을 받아들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눈에 훤하다. 일본 화가 다카하시 유이치의 <오이란>(1872) 이야기다.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시대에 살았던 작가는 이탈리아 화가 안토니오 폰타네지에게 유화를 배우고, 일본에 유입된 서양화를 참고자료 삼아 홀로 공부하며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방법을 익혔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화풍이 일본에도, 아시아 지역에도 아직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의 일이다. 그러므로 지위 높은 기생인 오이란을 (아마도) 언짢게 만든 이 그림은, 19세기 태동한 아시아 리얼리즘 미술의 산 증거인 셈이다.
리얼리즘이라 부를 만한 아시아 미술의 수작들을 한데 모아놓은 전시가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싱가포르국립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아시아 리얼리즘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중·일을 비롯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타이, 베트남, 필리핀, 인도 등 아시아 10개국의 회화 작품 104점이 소개된다. 한국 작품 13점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국내 최초 공개다. 이들 작품을 훑다보면 아시아 리얼리즘 미술의 관심이 대상의 객관적인 재현에서 민족으로, 소수자로, 전쟁과 사회비판으로 자연스레 이동한 흔적이 눈에 보인다. 그림 속에 아시아 역사가 꾹꾹 눌러 담겨 있는 느낌이랄까. 물론 미술사를 훑는 것보다 각 나라의 화풍과 낯선 작품들을 처음 접하는 재미가 더 크다. ‘아시아의 밀레’라는 호칭을 붙이고 싶은 필리핀의 국민 작가 페르난도 아모르솔로의 농촌 그림이나 한용운의 시 <해당화>를 떠올리게 하는 한국 작가 이인성의 쓸쓸한 아낙네 그림, 베트남전 ‘하노이 크리스마스 폭격’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판께안의 작품 등을 추천하고 싶다. 이번 전시에서 또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도록’이다. 아시아 10개국의 미술사가, 평론가, 큐레이터 25인의 작품 설명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전문가의 특강없이 아시아 리얼리즘 미술사를 파악할 좋은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