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가톨릭은 국교나 다름없다. 관광객에게는 이 나라가 그저 도덕적으로 방탕한(?) 여느 휴양지처럼 보이겠지만,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그들의 삶에서 종교가 발휘하는 역할에 놀라게 된다. 현대사회의 신도들이야 세속적 삶과 종교적 삶을 비교적 분명하게 구별해놓고, 후자에 일주일의 하루를 할당하여 ‘주일’이라 부르는 정도일 것이나, 필리핀에서 종교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제법 세속적인 사람들의 몸속에도 가톨릭의 도덕이 삶을 조직하는 원리로 들어앉아 있다.
가톨릭은 필리핀 사회의 ‘슈퍼에고’다. 천주는 아마 필리핀 사람들을 당신의 가장 충직한 자식으로 여길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금지를 결코 억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곳에서는 부활절마다 산 사람을 십자가에 매다는 퍼포먼스가 행해진다. 누가 그 고행을 사서 하겠냐마는 해마다 자신을 매달아 달라고 자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선단다. 그나마 요즘은 행사가 십자가에 팔다리를 매다는 정도로 그치나, 과거에는 정말로 손과 발에 대못을 박아 십자가에 달았다고 한다. 슈퍼에고와 아예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이랄까?
우연히 길에서 ‘파티마’라는 이름의 조그만 예배당을 발견했다. 파티마는 스페인의 시골 마을로, 100 여년 전 성모가 아이들에게 직접 나타나셨던 곳.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를 공식적으로 ‘기적’으로 보는 모양이나, 의심 많은 도마는 그 사건에서 그저 정신분석의 사례를 볼 뿐이다. 제 삶을 조직하는 도덕이 아버지나 어머니의 형상으로 자기 앞에 나타난다. 얼마나 황홀한가? 현대에 들어와 그것은 아이들의 체험이 되었지만, 몇 세기 전만 해도 신이 다 큰 어른들(성자와 성녀들)이 제 앞에 나타난 신을 보고 엑스터시에 빠지곤 했었다.
현현. 객관적 체험에서 주관적 체험으로
이렇게 신이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현현’(apparition)이라 부른다. 구약시대에는 신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일이 잦았다. 대표적인 장면은 아마도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장면일 거다. 물론 유대의 신은 시각적 형상이 되기를 거부했기에, 그 누구도 그의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모세도, 사무엘도 그저 그의 음성을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신은 인간들에게 다른 형상을 보내 자신의 존재를 확신시키곤 했다. 가령 아브라함에게 그는 천사들을 보냈고, 에스겔 선지에게는 오늘날의 UFO를 닮은 괴상한 형상을 보내주었다.
신은 갖가지 이적을 통해 인간들에게 제 존재를 드러내곤 했다. 가령 파라오에게 재앙을 내리고, 애급(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갈라주고, 풍악 소리에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게 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 들어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신은 좀처럼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신약에도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거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뱀이 혀처럼 날름거리는 성령의 불을 내렸다는 얘기는 있다. 하지만 이것과 그 밖의 몇 가지 예를 제외하면 신약의 야훼는 숨은 신이나 다름없다.
구약과 신약의 시대에 ‘현현’은 공동체 전체의 ‘객관적’ 체험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막에서 야훼가 보낸 불기둥을 함께 보았고, 야훼가 내린 만나를 함께 먹었다. 예수가 세례받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을 함께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의 교회사에 기록된 성자와 성녀들의 엑스터시 체험은 실은 그들 자신만의 내밀한 ‘주관적’ 체험이었다. 한마디로 그것들은 심리적 사건들이다. 근대에 들어오면 머리가 다 자란 자식들 앞에서 창피했던지, 신은 오직 자신의 존재를 굳게 믿는 자식들에게만 은밀히 모습을 드러낸다.
아도르노의 꽃불
철학자 아도르노는 현현의 개념을 종교적 맥락에서 세속적 맥락으로 옮겨놓는다. 현현은 유토피아의 급작스러운 나타남이다. 아도르노는 그것을 불꽃놀이에 비유했다. 밤하늘을 수놓는 꽃불은 황홀하나 그 생명은 아쉬울 정도로 짧다. 가끔 꽃불이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나, 그럴 경우엔 까만 밤하늘이 온통 꽃불의 낙서들로 지저분해질 것이다. 꽃불의 아름다움은 외려 그것이 덧없다는 데에서 나온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잠깐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고 마는 꽃불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아도르노의 꽃불은 물론 한때 ‘사회주의’라 불리던 근대의 유토피아를 가리킨다. 당시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타블로와 같은 그림으로 생각하고는 사회를 거기에 맞추어 뜯어고치려 했다. 그 발상은 금방 역사적 오류로 드러났다. 이미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기 오래전에 (적어도 스탈린-히틀러의 불가침 조약을 목격한 이후에는)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라는 신학은 더이상 대놓고 자랑할 만한 것일 수 없었다. 마구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다가 모습을 감춘 신처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는 자동인형 속에 숨은 난쟁이가 되어야 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대안이라며 이상사회의 완성된 그림을 제시한다면, 아마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유토피아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외려 자본주의가 세계적 승리를 구가할수록 사회주의의 이상은 더욱더 절실하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사회주의적 상상력을 억압하지 말라.” 내 말이 그 말이다. ‘자칭’ 좌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상상력의 빈곤, 즉 ‘국유화’라는 낡은 구령에 맞춰 제자리걸음만 하는 지적 태만이다. 오늘날 사회주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두운 현실에 불꽃놀이를 그리는 창조의 능력이어야 한다.
신학에서 미학으로
부정신학이라고 해야 할까? 신은 존재하지 않아도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신이 인간 앞에 나타나지 않아도 종교는 기능할 수 있다. 사회주의 신학도 마찬가지다. 신은 이미 오래전에 숨어버렸다. 이상사회의 그림을 보지 않고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냐고? 유럽인들도 한때는 형상금지의 계율, 즉 신이 형상없이 존재한다는 교리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들은 그것을 당연히 생각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정말로 파티마에서 성모가 애들 앞에 나타났다고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종점에 사회주의가 도래하리라는 말씀은 구약이, 낡은 약속이 되었다. 이렇게 신이 모습을 감추자 새로운 종파가 등장했다. 이들은 신이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사탄이 존재하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한다. 즉 사회주의가 가능할지는 모르나 적어도 자본주의가 악이라는 것은 확실하다며, 이들은 신앙의 새로운 기준을 세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자만이 진정한 사회주의자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이들이 믿는 것은 신의 존재가 아니라 사탄의 존재다. 이 모두가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에서 비롯되는 해프닝이다.
사회주의의 낡은 그림이 사라진 것은 외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카메라로 인해 회화가 할 일이 사라졌을 때, 예술은 현실의 모사에서 벗어나 다양해질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불기둥이 사라진 것이 상상력이 빈곤한 이들에게는 악몽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깜깜한 밤하늘이 불꽃놀이의 이상적 조건인 것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이들에게 텔로스의 사라짐은 오히려 축복이다. 오늘날 사회주의자는 제 머릿속의 관념을 영원한 목표로 강요하는 종교재판관이 아니라, (아주 잠깐이나마) 저마다 밤하늘에 자기의 꽃불을 그리는 예술가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