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손댄 다음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테트리스>가 가끔 생각난다. 담배 연기 자욱한 오락실. 점점 빠르게 떨어지는 블록들. 나한테 있는 기지와 인내를 총동원해 여러 줄을 한꺼번에 지울 때의 쾌감. 이 모든 기억들에 겹쳐지는 것이 러시아 민요풍의 음악이다. 음악이라기보다는 기계음에 가까운 질 낮은 음향이었지만, <테트리스>의 유례없이 독창적인 시스템도 음악이 없었으면 조금은 바랬을 것이다.
좋은 음악이라고 전부 게임음악으로 적당한 건 아니다. 게임 분위기와 시스템에 잘 어울려야 하는 건 물론이고, 게임에 따라서는 상당히 오랜 시간 듣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듣기에 너무 피곤한 음악도 곤란하다. 그렇다고 너무 밋밋해서는 카페의 배경음악처럼 어색한 빈 공간을 무마하는 역할에 그칠 뿐이다.
음악은 다른 모든 요소들과 어우러져 게임을 빛낸다. <파이널 판타지6>에서 음악이 없었다면 벼랑에서 스스로를 던지려는 세리스의 외로움이 그렇게까지 절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2>의 음악은 알록달록 조금은 촌스러운 건물들에 웅장한 판타지를 덧씌운다. <대항해 시대2>에서 음악은 조잡한 도트로 표현된 바다를 거센 파도가 넘실대는 대양으로 바꿔놓는다.
신기한 것은, 플레이할 때는 조연에 머물던 음악이 게임이 끝난 뒤에는 오히려 제일 강렬하게 남는다는 것이다.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몇십 시간 동안 게임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낀다. <디아블로>의 어두운 던전에서 홀로 적과 맞서며 공포와 외로움을 맛보고, <버블버블>의 끝없는 스테이지를 아슬아슬하게 넘기며 긴장과 안도감을 번갈아 느낀다. <워크래프트>를 하면서 제대로 길을 못 찾아오는 아군에 혈압이 올라가고, <시렌>을 하면서 무심코 저지른 실수에 두 시간 이상 플레이한 것을 헛수고로 만들며 나락 같은 좌절과 자기 혐오에 떨어진다.
게임이 끝나고 머리 속에서 울리는 음악은 게임을 하지 않은 사람이 듣는 것과 전혀 다르다. 게임을 하며 울고 화내고 웃고 슬퍼했던 것들이 음악을 새롭게 반짝이게 한다. 이미 오래된 플로피디스켓으로 나왔던 <룸>의 CD 버전을 어떻게든 다시 구해서 해보는 것도 그래서다.
일본에서 게임음악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산업이다. 웬만한 게임음악은 전부 O.S.T가 따로 출시되며, 게임음악 차트까지 활성화되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롤플레잉게임 <파이널 판타지>의 주제가를 누가 불렀는지는 항상 대단한 관심사항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관록의 일본 가수가, 때로는 홍콩 최고의 여가수가 주제가를 부른다. 또다른 유명 롤플레잉게임 <드래곤 퀘스트>는 메인 테마를 중심으로 오케스트라 공연이 열리곤 한다. 게임 출시를 기념하는 반짝 이벤트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연주회 레퍼토리에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한다.
국내 게임음악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대개 외주를 주는데 그나마 음악감독을 따로 두고 있는 회사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하지만 큰 회사를 중심으로 O.S.T가 발매되기 시작했고, 12월23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게임음악회도 열린다. 많지는 않지만 탄탄한 팬층을 거느린 국내 타이틀이 몇개 있다. 이 게임들을 플레이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다시 한번 헤아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음악회가 게임음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서 게임의 즐거움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박상우/게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