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공이 뭐하는 곳이지?”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김연호 대표와의 만남을 주변 사람들에게 슬쩍 흘렸더니 돌아온 반응들이다. 올해 무려 10주년을 맞은 기관이지만, 홍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아이공’이란 이름은 다소 어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아이공은 국내에 바버라 해머, 샹탈 애커먼, 마야 데런 등 여성주의 감독들의 영화를 처음으로 소개한 기관이라고. 서울국제영화제(국제디지털영화제), 레스페스트디지털영화제 등 디지털을 화두로 내세운 영화제들이 명멸하는 가운데 ‘서울뉴미디어페스티벌’이란 이름의 영화제를 올해까지 무난하게 주관해온 단체라고. 한국의 척박한 대안영상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한 이 단체를 10여년간 혈혈단신으로 이끌어온 김연호 대표를 만났다.
-최근 오노 요코 기획전이 잘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아쉽다. 극장에 한달을 채 못 걸었거든. 지금 생각하면 상영 날짜를 좀 넉넉히 잡을걸 그랬다. 영화마다 배급사가 달라서 필름 수급도 힘들었는데.
-인터뷰 전에 기사를 검색해보니 아이공 얘기만 나오고, 대표님 인터뷰가 너무 없어서 놀랐다. 벌써 아이공도 10주년인데. =생각해보면 그동안은 일부러 그랬던 것 같다. 나에게 이야기가 집중되면 아이공이 묻힐 것 같아서, 어떻게든 아이공을 더 외부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개인 인터뷰가 들어와도 아이공 얘기만 하고 그랬다. 그런데 이제 10년쯤 되고 아이공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이쯤이면 내 얘기를 해도 되지 않겠나 싶더라. 오늘 마음먹고 나온 거다. (웃음)
-그렇다면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을 설립하게 된 계기부터 들어보자. =무척 긴 이야기인데…. 일단 그 당시에 내가 뭘 하고 살았는지부터 말해야겠다. 스물세네살 때부터 홍대쪽을 놀러다녔다. 그 당시 어울리던 친구들과 같이 밴드하자며 주말마다 합주도 하고, 서울여성영화제, 퀴어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의 영화제를 보러다니곤 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비디오작가연대에 들어가게 됐다. 홍대를 기점으로 비디오작가들이 모여 서로 작품 만드는 것도 도와주고 상영도 하고 평가도 하는, 그런 모임이었다.
-아이공이 비디오작가연대를 계승했다는 얘기도 있더라. =그렇다. 비디오작가연대를 3년 정도 하니 남자 대학생들은 그동안 군대 가고, 또 다른 이들은 자기 삶을 찾아서 가더라. 그러니까 이 단체는 동아리식으로 진행됐던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끝내버리기엔 단체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컸다. 당시만 해도 비디오로 만든 작품을 아마추어적이라고 했고, 인디포럼 같은 곳에서도 출품작의 80%가 필름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비디오페스티벌이 전세계에 굉장히 많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비디오 문화를 한국 사정에 맞게 보다 전문적으로 확장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공이란 단체를 만들게 된 거다.
-그런데 원래 꿈은 동화작가였다고 들었다. =맞다. 대학생 때 국문과에 진학한 것도 동화작가 되려고 간 거였다. 권정생 작가가 롤모델이었는데. (웃음) 그래서 비디오작가연대 활동하면서도 꾸준히 동화도 쓰고 시도 썼다. 그런데 아이공을 만들고 보니 비디오 기획일과 동화 쓰는 일은 머리 쓰는 게 정말 다르더라. 기획일은 이성으로 해야 하고 동화 쓰는 건 감성으로 해야 하는데. 아이공만 자리잡으면 내가 다시 동화 시작한다, 하고 확 버렸다. 동화 쓰는 일을 잠시 뒤로 미루고 쳐다보지도 않은 거지.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이공 일을 하게 된 것도 동화작가를 꿈꾸던 이유의 연장선에 있다.
-어째서 그런가. =동화나 시를 좋아한 이유가 그것들이 은유적이고 환유적이고 함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 재미가 있었다. 영상에도 그런 매력이 있더라. 예를 들면 어떤 하나의 양식과 스타일과 문법이 정확히 다른 걸 장르라고 하는 거잖나. 그런데 영화에는 장르가 너무 없었다. 코미디나 멜로영화도 주제가 다른 거지 영화의 스타일이 다르다고 말할 순 없다. 그래서 극영화나 상업영화,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재미가 뚝 떨어지고 장르를 새롭게 개발한 작가들을 발굴하는 데에 대한 흥미가 확 다가온 거다.
-아이공이라는 이름은 직접 지었나. =그렇다. 스탭들과 상의해서 지었다. 원래는 디지털을 의미하는 숫자 1과 0을 합해 101로 지었다. ‘대안문화영상발전소 101’로 리플릿도 만들었는데…. 마침 홍대 클럽 중에 101이란 곳이 있는 거다. (웃음) 그래서 생각을 돌려 1을 ‘I’로, 0을 ‘공’으로 읽어보니 아이공, 너무 예쁜 거다. ‘스스로 비우는 활동’이란 뜻으로 간단히 이름만 지어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름 앞에 ‘대안영상’은 무조건 붙였다. 대안영상을 만들겠다는 게 우리 단체의 주목표였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은 알지만, 여전히 아이공이 어떤 단체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다. 지금까지의 주목할 만한 활동을 소개한다면. =먼저 2002년에 기획했던 포스트 다큐멘터리 기획전이 기억에 남는다. ‘포스트 다큐멘터리’라는 단어가 아예 없던 시절이다. 2000년대를 전후로 경순의 <애국자 게임>이나 최진성의 <뻑큐멘터리 박통진리교>처럼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 CF 같은 주류 미디어의 다양한 스타일을 녹여낸 다큐멘터리가 등장했는데 이 작품들을 묶을 수 있는 이름이 없었다. 우리(아이공) 마음대로 ‘포스트’란 수식어를 붙여 기획전을 열었는데 다큐멘터리 분야의 반응이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아, 어쩌면 이런 기획을 사람들이 기다려왔을 수도 있겠다, 뻘 짓을 더 많이 해도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담론을 만드는 데 용기를 얻게 된 거다. 그리고 2003년에 열었던 <페미니즘 비디오 액티비스트전>이 있다. 바버라 해머, 세실리아 컨딧, 마사 로즐러 등의 여성주의와 관련된 영상 작업들을 묶어서 소개했는데, 여성주의 진영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바버라 해머의 작품이 상영될 때는 아이공 개관 이래 첫 매진 사례를 기록했고. 보다 본격적으로 여성주의를 녹여낸 작업을 찾아야겠다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아이공을 거쳐간 감독도 많은 줄로 안다. =손재곤, 김곡·김선, 윤성호, 김종관, 김경묵 감독 등이 있다. 모두 현재 독립영화계 혹은 충무로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감독들이다. 특히 김경묵 감독은 아직도 생각나는 게…. 중학생 때부터 아이공을 찾아와서 기획전을 보고 돌아가던 기억이 있다. 그랬던 아이가 어느새 어른이 되어 2005년에 <나와 인형놀이>라는 작품으로 우리가 주관하는 서울뉴미디어페스티벌(이하 네마프·국내외의 대안영상을 소개하고 신진작가를 발굴하는 미디어아트영화제-편집자) 상도 받고.
-그 감독들에게 아이공이 미친 영향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아이공을 거쳐간 감독들에게 굉장히 많이 들은 내용인데, 다들 이렇게 말한다. 내 영상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었다고. 극영화도 다큐멘터리도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다만 만들고 싶어서 제작한 영화인데 아이공에서 이름을 붙여주고 의미를 부여해주니 속이 후련하다고. 정답을 찾은 느낌이라고 말하더라. 김종관 감독의 작품을 예로 들면 <운디드>를 두고 우리는 ‘영화시적인 작품’이라 말했다. 윤성호 감독은 초창기부터 즉흥적이고 재기발랄하고 빠르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성격이 강한 작품을 만들어온 감독이고. 김곡·김선의 작품은 시각영화를 중심으로 한 실험영화의 특성이 강했다. 네 감독 모두 초기 스타일에서 조금씩 벗어나 독립 극영화쪽으로 우회했지만, 여전히 자신만의 스타일과 감성은 가지고 있다. 그런 감성들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공이 새롭게 발굴해낸 장르가 있다면. =리듬영화, 영상에세이, 무용영화 등이 있다. 우리가 아예 새롭게 발굴해냈다기보다는 해외의 사례를 참고한 뒤 국내에 최초로 소개한 작품들이 많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조금 아까 얘기했던 ‘포스트 다큐멘터리’는 우리가 이름붙인 장르다.
-10년을 버텨내며 위기도 있었을 것 같다. =많았지. 사실 2004년에 아이공이 잠정 해체를 한 적이 있다. 2∼3년간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걸 아이공에 쏟아부었지만, 우리가 수익사업을 하는 단체도 아니고 회원 수로 유지되는 단체도 아니다 보니 재정적인 문제가 너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주변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그보다 더 속상했던 게 무관심과 냉대였다.
-구체적으로, 누구의 무관심과 냉대일까. =굳이 얘기하자면 독립영화계가 그랬다. 우리가 소개하는 작품을 영화로 봐주질 않더라. 여성단체, 홍대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예술축제, 그리고 미술계에서는 아이공의 기획을 인정해주고 환영해주는데 정작 영화계에서 아이공은 항상 논외의 단체였다. 독립영화정책사업이나 영상정책사업을 논할 때 아이공이 한번도 테이블에 함께 들어간 적이 없는데, 어떻게 보면 그런 무관심은 우리가 주목하는 소수자, 여성주의, 비주류의 역사를 무시하겠다는 말로도 느껴졌다. 그런 부분이 많이 괴로웠다. 지금은 쌓였던 오해도 풀고 나도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 당시엔 섭섭했던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런 상처가 2007년 미디어극장 아이공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됐다.
-극장을 만들고 나니 어떤 변화가 있던가. =자존감이 좋아졌다고 해야 하나. 그 이전에는 영화 기획전을 하려 해도 상영할 장소가 없으니 항상 극장을 알아보러 다녔다.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도 많이 해야 했고. 극장이 생기니 우리 마음대로 기획하고, 강연하고, 워크숍도 진행하고. 너무 좋은 거다.
-곧 네마프가 개막한다. 10회를 맞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올해부터 이름에 ‘국제’가 붙는다. 또 ‘그래픽영화’라고 새롭게 소개되는 장르가 있고, 무엇보다 올해는 지금까지 해왔던 걸 어떻게 더 안정적인 토대에서 소개할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다. 관객에게 너무 어렵다, 좀더 친절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스크린에서 상영하는 작업과 전시로 상영하는 작업을 따로 나눴다. 이름도 각각 서울뉴미디어아트영화제와 서울뉴미디어아트전시제로 따로 부르고, 공모도 분리해서 접수받았다.
-10회 상영작 중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임덕윤 작가의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0.43>이다. 이분은 충무로 영화 스탭으로 10여년간 일한 분인데 사고를 당해서 시각장애인이 되셨다. 이번에 출품한 작품은 시각장애인이 만든 첫 시각장애 영화다.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 생각하고, 앞으로도 계속 이분만의 스타일을 굳히는 작업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작가님에게도 말씀드렸다.
-이제 기반은 다졌다고 봐도 될 것 같다. 향후 10년의 아이공의 화두는 무엇일까. =최근 가장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 불교에 관련된 자료다. 워크숍을 진행하다보니 참석자들의 99%가 자기 상처에 관한 이야기를 하더라. 그런 모습들을 보며 불교가 추구하는 사랑이나 평화나 연민이나 자비, 이런 치유의 감정들을 영상으로 어떻게 연계할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이 간다. 이 고민이 지금까지 해왔던 활동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있겠지 싶다.
-그럼 다음 10년 동안에도 ‘아이공 대표’ 김연호를 볼 수 있는 건가. =아직까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 2006년에 인생이 한번 확 뒤집혔다. 그동안 억누르고 살았던 동화와 시를 쓰고 싶은 욕망이 확 올라오면서, 끊임없이 이성적인 기획안을 쓰고 작품을 섭외하는 일이 족쇄처럼 느껴졌다. 그때 거의 일주일에 한번은 운 것 같다. 너무 속상해서. 그러다가 친구와 함께 치악산에 갔는데, 식당에 갔더니 수녀님들이 일렬로 앉아서 식사를 하고 계시더라. 그리고 절에 갔는데 스님들이 정갈한 모습으로 앉아계신 거다. 그때 인생의 가치와 에너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 생각하며 전율을 느꼈다. 저런 에너지가 전달이 되니 내가 아직도 활동하나보다 싶은 느낌이었던 거지. 과거에는 그런 종교인들이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고 이끌었다면, 최근엔 많은 활동가들- 미디어운동, 인디문화예술작가 등- 이 그 몫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나도 그 일원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활동가들을 많이 키워내야겠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