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연애를 도와드립니다! 시라노 에이전시는 사랑의 호르몬이 분비될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조작’함으로써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맞아들어가는 상황 설정은 물론 캐릭터와 취향, 잘생겨 보이는 얼굴 각도까지 맞춤 설계를 통해 사랑의 인연을 맺어준다. 그렇게 연애 의뢰 100% 성공률에 도전하는 <시라노; 연애조작단>(제작 명필름, 제공·배급 롯데쇼핑(주)롯데엔터테인먼트)의 촬영현장을 3번에 걸쳐 찾았다. 무엇보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엄태웅, <꽃보다 남자>의 이민정, <지붕 뚫고 하이킥!>의 최다니엘, <미남이시네요>의 박신혜를 한자리에서 본다는 즐거움이 가장 컸다. 그들이 김현석 감독의 정서 안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난 7월5일 연희동의 한 주택가에서 총 49회차, 2개월여의 촬영을 끝낸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올해 추석 개봉예정이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에 등장하는 ‘시라노 에이전시’는 연애에 서투른 사람들을 대신해 연애를 이뤄주는 연애조작단이다. <시라노>는 바로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이자, 가장 익숙하게는 제라르 드파르디외 주연의 프랑스영화인 <시라노>(1990)에서 따왔다. 큰 코에 콤플렉스가 있는 시라노는 8촌 여동생 록산느를 사랑하지만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역시 록산느를 사랑하지만 글솜씨가 없는 미남자 크리스띠앙을 대신해 연애편지를 써준다. 그 투철한 ‘시라노 정신’에 입각한 2010년 대한민국의 시라노 에이전시는 완벽하게 짜여진 각본은 물론 거의 영화 촬영장을 방불케 하는 조직력을 무기로 의뢰인의 사랑을 이뤄준다.
그러던 어느 날, 에이전시 대표인 병훈(엄태웅)과 그의 작전요원 민영(박신혜)은 “여기가 사랑을 이뤄주는 곳입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라고 물으며 찾아온 예측 불허의 의뢰인 상용(최다니엘)을 만나게 된다. 키 크고 멀쩡하게 잘생기면 뭣하나, 그는 숙맥 중 숙맥이다. 어쨌건 그가 사랑에 빠진 여자는 속을 알 수 없는 미모의 여자 희중(이민정)이다. 그리고 희중의 프로필을 본 순간 병훈은 고민에 빠진다. 처음으로 프로젝트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 하지만 막대한 프로젝트 수행비도 마다하지 않는 상용으로 인해 프로젝트는 시작되고, 병훈은 갖가지 말도 안되는 전략들로 상용이 스스로 포기하기만을 기다린다. 그런 병훈의 이상한 행동을 의아해하는 민영은 그와 타깃녀인 희중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 도대체 두 사람은 어떤 사이기에?
#6월16일, 작전 카페 - 엄태웅의 음성변조 5종 세트
희중 저기요, 방금 전 노래 누가 부른 거죠? 예전에 자주 듣던 노래인데…. 병훈 (음성 변조 모드로) 아그네스 발차 희중 제목은요? 병훈 (CD 재킷을 보는 척하며 몸을 더 감춘다)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되었네>. 희중 …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되었네.
바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이민정. 엄태웅은 최대한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목소리를 변조한다.
엄태웅과 같은 연애조작단에서 활동하는 박신혜는 그런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본다.
서울 합정역 부근의 한 카페,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희중을 향한 작전이 펼쳐지고 있는 곳이다. 바 안쪽에 있던 병훈은 음악이 끝나고 다음 곡으로 갈아야 할 타이밍에서, 놓인 CD들 대신 컴퓨터 뮤직플레이어에서 뭔가를 생각하고는 곡명 검색란에 뭔가를 입력하고 재생한다. 꼭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음악에 희중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바쪽으로 간다. 희중이 병훈을 발견해선 안되는 상황이기에, 민영은 쨍그랑 유리잔을 깨트린다. 상황을 파악한 병훈은 모자를 눌러쓰고 급히 몸의 각도를 틀고는 음성을 변조한다. 희중이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을 찾아 움직일 때, 연출부는 급히 연기를 피워올린다. 그렇게 바는 신비스러운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희중이 갑자기 그 음악에 왜 반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건 그녀는 그 음악이 그리 낯설지 않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둘은 과연 어떤 사이인지, 엄태웅이 왜 음성변조 5종 세트를 가동하면서까지 희중에게 그의 존재를 눈치채게 하면 안되는지.
이제 막 지어진 카페가 영업을 개시하기도 전에 <시라노; 연애조작단>에 공간을 내줬다. 1층은 작업을 위한 카페로, 2층은 조작단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사무실 곳곳에는 ‘접수번호 XXX 의뢰인 김OO 40% 진행 중’, ‘의뢰인 OOO 제7차 시도 @덕수궁… 20명 동원’ 같은 현황판과 주간 일정표가 빼곡히 적혀 있다. 김준 미술감독의 센스가 돋보이는 설정들이다. 엄태웅은 수시로 위아래를 오르락내리락하고 박신혜는 그런 그를 의심의 눈길로 쳐다본다. 카페 마당과 내부, 그렇게 두개의 공간을 함께 쓰는 까닭에 날씨가 문제다. 살짝 비가 오고 흐리던 날씨가 갑자기 돌변해 뙤약볕이 내리쬔다. <파주>를 끝내고 <시라노; 연애조작단>에 합류한 김주경 PD는 “내내 날씨와의 싸움”이었다고 말한다. 흐린 날씨에 맞춰 30분가량 카메라 위치를 정하고 조명기구를 설치한 김우형 촬영감독과 김승규 조명감독은 난감해졌다. 그러다 저 멀리서 구름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게 보인다. 그리고 김현석 감독과 그들의 삼자대면이 시작됐다. 짧은 회의가 끝난 듯 조감독이 외친다. “3분 뒤에 오는 구름을 기다려요.”
주택가에 자리잡은 촬영 카페지만 현장은 조용하다. 엄태웅과 박신혜가 1층과 2층을 오가는 계단에 서고, 마당에 이민정이 나타나자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이날 촬영 분량이 없었던 최다니엘이 빠지긴 했지만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공교롭게도 ‘드라마 스타’들이 총집합했다. <선덕여왕>의 엄태웅, <꽃보다 남자>의 이민정, <미남이시네요>의 박신혜, <지붕 뚫고 하이킥!>의 최다니엘, 그렇게 서로 다른 인기 드라마에서 활약했던 이들이 그 드라마의 이미지와는 서로 전혀 다르게 등장한다는 것도 흥미롭다. 정작 본인은 드라마를 잘 안 본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감독이 정말 영리한 캐스팅을 했다고 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날보다 앞서 촬영한, 그러니까 조작단의 첫 번째 작업(?)으로 등장한 두 배우는 바로 <방자전>의 송새벽과 류현경이다. <방자전>식으로 말하자면 변학도가 향단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의뢰를 청한 것. 여기서도 송새벽 특유의 화법은 여전하다고. 당연히 <방자전>을 보기도 전에, 오디션을 비롯해 실제 촬영에 이르기까지 심재명 대표와 김현석 감독 모두 그를 보고 웃음을 참기 곤란했단다. 어쩌면 그 장면을 가장 기다리고 있는 팬들도 많을 것이다.
#6월22일, 고양 어울림누리 아이스링크- 한 100 바퀴 돌았나
재필 돈질 제대로 한다, 정말. 철빈 우리 고객들이 대체로 돈들은 좀 있지. 저 아줌마 섭외냐? 재필 네, 주부 피겨 교실 수강생이래요. 단가 좀 세요 철빈 저쪽 보조 애들 많이 어설프다. 십장 좀 쫘라!
엄태웅, 박신혜와 함께 시라노 에이전시의 멤버인 뮤지컬 스타 전아민과 박철민. 의뢰인에게 무한 감동을 선사하기 위해 아이스링크의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스링크 중앙에서 어린이들에게 스케이팅을 가르치고 있던 여1 앞에서 남1이 멈춰서고, 의아한 표정의 여1 앞에서 남1은 여행 가방을 열어 연거푸 선물을 내민다. “이건 두살 생일 선물, 이건 세살 생일 선물, (중략) 이게 마지막으로 너의 스물세 번째 생일 선물. 널 만나기 전의 네 생일은 이렇게 한꺼번에 챙겨줄 수밖에 없지만, 앞으로 남은 생일들은 함께하면서 선물하고 싶어. 평생.” 남1은 반지를 꺼내 여1에게 내밀고 무릎을 꿇는다. 그러고는 환호하는 아이들과 주변 사람들.
촬영 중반이지만 아이스링크가 쉬는 날을 기다려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가장 첫 번째 장면이 촬영 중이다. 철빈(박철민)과 재필(전아민)은 병훈, 민영과 함께 조작단의 멤버들이다. 그들은 의뢰인과 타깃녀를 따라 한여름에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아이스링크를 거의 100번 가까이 돈 것 같다. <스카우트>(2007)에서 맹활약하고 김현석 감독과 같은 야구팀의 일원이기도 한 박철민은 그의 영화에서 없어서는 안될 빛나는 조연이 됐고, 전아민은 영화 <레드 아이>(2005)를 비롯해 뮤지컬 <젊음의 행진>의 ‘댄싱킹’ 상남 역할로 인기몰이를 한 뮤지컬 스타다. 그들은 서울의 카페란 카페는 물론 아이스링크까지 누비며 작업의 손길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서울의 온갖 데이트 명소는 다 나올 것”이라는 게 김주경 PD의 얘기다.
한여름이지만 아이스링크 내부는 춥다. 빙질을 위해 스탭 모두 덧신을 신었고 두꺼운 겨울 점퍼도 기본이다. 김현석 감독도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스케이트를 신었다. 한편, 그들 중 가장 두꺼운 점퍼를 입은 사람은 바로 김우형 촬영감독이다. ‘오버’인가 싶어도 카메라를 다루는 데 있어 추위에 조금이라도 떨면 안되는 사람이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런드리 워리어>와 <만추>를 끝내고 국내에 돌아와 <시라노; 연애조작단>에 합류했다. 해외 촬영으로 무척 고생했다는 얘기를 들어 인사를 건넸더니 “내 입으로 좀 얘기하고 다녔는데, 소문이 잘 났나 보네요”라며 웃는다. 모두가 ‘조용한 카리스마’라고 말하는 그는 촬영장의 무게중심 같은 존재이다. 명필름과는 <파주>(2009)도 함께했는데 앞서 두 영화와 <파주>와 비교하면 어딘가 좀 편한 작업이지 않을까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이동이 많고 야외 촬영이 많아 힘든 건 매한가지라고.
#6월28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가을이라고 주문을 걸고 있지
병훈 김희중씨는 함메르 머시기의 그림을 보러 나타날 겁니다. 제보자를 밝힐 수 없지만. 전시 기간이 2주니까 재필이 네가 2주 동안 시립미술관 앞에 죽치고 있다가 김희중씨가 발견되면 바로 연락…. 상용 (말을 끊으며) 아닙니다.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그러고 싶습니다.
최다니엘은 영화 속 상용의 모습과 실제 자신이 무척 닮았다고 말한다. 빈틈없어 보이는 그가 희중의 등장 앞에 우왕좌왕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라니….
상용은 희중을 만나기 위해 미술관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병훈이 그와 함께한다. 하루 종일 그림 앞에 서 있던 상용은 배가 고파 샌드위치를 먹다가 안내원의 제지를 받고 쫓겨나기도 하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미술관 입구에 앉아 있기도 하면서 희중을 기다린다. 그러다 마침내 희중이 나타나지만 상용은 준비했던 표정과 포즈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다리가 풀려버린다. 그렇게 희중을 향한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작업은 본격적인 마무리로 나아간다.
대낮의 미술관 입구, 역시나 엄청나게 무더운 날이지만 가을이라는 배경 때문에 모두 긴팔 옷을 입고 있다. 최다니엘은 “가죽 재킷을 입은 날도 한두번이 아니었다”며 웃는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빈틈 없어 보였던 최다니엘은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 자신의 헐렁한 본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희중의 등장에 우왕좌왕 난리법석을 떠는 모습이 영락없다. 그 자신도 “실제 내 모습과 참 많이 닮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어딘가 전혀 다른 부류의 인간처럼 느껴졌던 병훈과 상용 사이의 공통점도 드러난다. 의뢰인과 피의뢰인 사이지만 어딘가 둘 다 사랑에 서툰 모습이랄까. “쓰면서도 느끼지 못했는데 촬영 중반쯤 되니 두 사람이 참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김현석의 감독의 얘기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김현석 감독이 무려 15년 전에 썼던 시나리오 <대행업>의 리뉴얼이다. 시라노 에이전시가 그런 사랑의 대행업을 한다는 설정만 놔두고 다 바꿨다. 에피소드도 완전히 교체했으니 사실상 같은 이야기라고 보긴 힘들다. 그 사이 <Mr. 히치: 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2005) 같은 영화도 나왔고 그와 유사한 느낌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리얼TV 프로그램도 많아졌다. 그 사이에서 자기만의 색깔과 재미를 찾는 작업이 가장 힘들었고 어쩌면 그것이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심재명 대표는 “김현석 감독이 이 작품을 두고 자신의 로맨틱코미디 은퇴작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좋은 작품으로 제대로 은퇴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웃으며 “<스카우트>를 보면서도 그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이었기에 나 역시 관객으로서 이 영화가 무척 궁금하다”고 말한다. 2개월여 촬영을 끝낸 영화는 현재 분주히 후반작업 중이다. 배우들은 무더위와 싸우며 긴팔 재킷으로 땀을 쏙 뺐지만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그 긴팔이 어색하지 않을 추석 시즌에 우리를 찾아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