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에나 외국인들이 먹기 힘들어 하는 음식이 있다. 필리핀에는 ‘발롯’이라는 게 있는데, 그놈의 정체는 부화하다가 만 반(半)병아리 상태의 달걀을 삶은 것이다. 어제 드디어 길바닥에서 놈을 먹어볼 기회를 가졌다. 먹는 법은 간단하다. 달걀 꼭대기를 깨서 구멍을 내고, 그리로 소금과 소스를 넣어 먼저 액즙을 마신 뒤, 이어서 껍질을 까서 나머지 고형물을 씹어 먹는 것. 먹다보면 씹기 힘든 딱딱한 부분과 마주치게 되는데, 내 생각에는 아마도 태반의 역할을 하는 부위인 것 같다. 맛은 사실 삶은 달걀과 거의 비슷하나, 씹는 느낌이 다르다.
현지인들은 발롯이 삶은 달갈보다 영양가가 더 높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배운터라 이 말이 썩 믿기지는 않으나, 누가 아는가? 실제로 그럴지. 질량과 에너지는 동일해도 장에서 소화되는 정도에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내가 먹었던 것은 부화 18일째 된 발롯이다. 초보자는 대개 이걸로 시작한다. 진짜로 먹기 힘든 것은 부화 21일째 이후. 이놈의 껍질을 벗기면 그 안에 이미 깃털이 난 병아리 태아가 들어 있단다. 이번에는 소프트코어에 그쳤지만, 다음에는 21일짜리 하드코어에 도전해볼 생각이다.
‘된다’는 동사가 지배하는 구간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달걀을 먹고 치킨을 먹으면서, 왜 유독 발롯에 대해서만 거부감을 느끼는 걸까? 200년 전에 되게 할 일 없는 어느 철학자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까지 심오한 철학적 성찰을 내놓은 바 있다. 독일 관념론의 대가 헤겔. 그는 개구리나 올챙이와 달리 그 둘의 중간, 즉 다리와 꼬리가 동시에 달린 놈은 왜 혐오스럽게 느껴지는지 묻는다. 이어서 대답하기를, 그것은 그놈이 온전히 개구리의 규정에도, 그렇다고 온전히 올챙이의 규정에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헤겔이라면 아마 발롯에 대한 거부감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설명했을 거다.
이는 헤겔의 <미학강의>에 등장하는 예다. 헤겔의 미학에 따르면,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이념’(규정)에 가장 잘 합치하기 때문이다. 제 이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놈, 가령 말을 예로 들자면, 말 중에서 가장 말다운 놈이야말로 아름답다는 얘기다. 반면 말의 이념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는 놈(가령 비루 먹은 말)은 아름답지 못하다. 때로 아예 합치해야 이념이 마땅찮은 것들도 있다. 가령 ‘아직 개구리가 아니나 이미 올챙이도 아닌 것’, ‘아직 병아리가 아니나 이미 달걀도 아닌 것’ 등이다. 그런 대상에 대해서는 아예 혐오감을 느끼게 된단다.
헤겔의 이런 설명의 바탕에는 ‘존재는 생성에 우선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가령 달걀이 병아리가 된다고 할 때, 헤겔이 선호하는 것은 두개의 명사, 즉 ‘달걀’과 ‘병아리’다. 그가 못 참아하는 것은 그 둘의 중간, 즉 ‘된다’는 동사가 지배하는 구간이다. 그런데 생명의 활동에서 가장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이 구간이 정작 헤겔에게는 혐오스럽게 여겨진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사물을 확립된 정체성(‘이념’) 안에 묶어놓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강박을 엿보게 된다.
이도 저도 아닌 존재는 ‘언캐니’하다. 그것에 대한 헤겔의 거부감은 이해할 만하다. 그것은 거의 자연적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런 중간적 존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문화도 있잖은가. 가령 필리핀 사람들은 발롯에 전혀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다. 외려 그것을 계란보다 더 좋아한다. 따라서 생성의 단계에 있는 중간적인 존재에 대한 혐오는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일 것이다. 그러니 이참에 헤겔의 발상을 뒤집어보는 건 어떨까? 마치 마르크스가 유물론적 변증법을 얻기 위해 헤겔을 물구나무 세운 것처럼.
기관없는 신체로의 ‘창조적 역행’
아무리 변증법적 ‘운동’을 강조한다 해도, 헤겔은 결국 ‘존재’의 철학자다. 그에게 ‘생성’이란 ‘아직 덜 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관점을 뒤집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생성’을 ‘되다가 만 존재’로 규정할 게 아니라, 외려 ‘존재’를 ‘활동하다 멈춘 생성’이라 부르는 거다. 한마디로 존재를 생성의 우위에 놓는 태도에서 벗어나 생성을 존재보다 더 근원적 사건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철학에서 이는 곧 플라톤주의에서 니체주의로 사고를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포스트’라는 접두사를 달고 80, 90년대를 풍미했던 철학들이 한 일이 바로 그 작업이었다. 실은 발롯을 먹으면서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발롯의 내부는 ‘계란 반(액즙) + 병아리 반(고형물)의 상태’. 이것이 그만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기관없는 신체에선 각 기관들이 자유로이 횡단하고 교차한다. 그것들의 역할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선 입이 항문의 역할을 한다. 귀가 색을 보고, 눈이 소리를 듣고, 입이 냄새를 맡는다. 랭보는 소리에서 색깔을 보았고, 칸딘스키는 형태에서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 공감각의 능력은 그들의 몸의 한구석에 아직 기관없는 신체가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기관없는 신체’는 일종의 존재미학으로 제기된 것이다. 사회는 개인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개인은 사회라는 거대한 신체 속에 하나의 기관(직업 혹은 역할)으로 명료하게 분절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자’일 뿐이다. 이 점에 관한 한 전통적 좌파나 우파나 차이가 없다. 이른바 ‘포스트’의 담론이 겨냥하는 것이 바로 근대라는 시대의 쌍생아가 공유한 그 공통의 지반이다. 여전히 사회를 기계에 비유해야 한다면, 기계에 대한 관념을 산업혁명적인 것에서 생명공학적인 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들뢰즈는 항상 생성의 상태로 존재하라고 요청한다. 즉 이미 분화를 마친 하나의 기관으로 만족하지 말고, 자신을 그 어떤 기관으로도 분화할 수 있는 잠재성의 상태를 유지하라는 얘기다. 이미 하나의 정체성으로 분화를 마친 신체를 다시 모태 속의 태아로 되돌리는 것은 퇴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더 큰 창조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가령 70여개의 서로 다른 인물이 될 수 있었던 페소아를 생각해보라. 그야말로 인간 줄기세포가 아니었던가. 기관없는 신체로 돌아가는 것은 진화론적 퇴화가 아니다. 들뢰즈는 그것을 ‘창조적 역행’이라 부른다.
헤겔의 눈에 올챙이+개구리가 징그럽게 보이고, 이방인의 눈에 달걀+병아리가 역겹게 보이듯이, 자신을 기꺼이 정체성으로 분화시킨 신체들은 정체성없는 신체에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그 거부감은 때로 적대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아예 기관없는 신체가 되라는 들뢰즈의 요구는 스튜디오에 외국인 데려다가 억지로 발롯을 먹이는 만행(필리핀에선 이 방송의 인기가 높단다)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세계를 바꾸려는 이들도 제 신체를 바꾸기란 어려운 일. 눈 딱 감고 발롯을 씹어 삼키는 고역 따위와는 애초에 비교가 되지 않을 거다.
이렇게 반박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성’이니, ‘잠재성’이니 떠들어도, 달걀의 가능성은 단 하나, 닭이 되는 것이다. 발롯이 되지 않았다면, 그 달걀은 부화하여 결국 닭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모든 비유는 불완전하게 마련. 그런 의미에서 약간 수정을 하자면, ‘기관없는 신체’란- 결국 닭이 된다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70여 가지의 서로 다른 개체로 변신하는 닭일 것이다. 혹은 동일한 알에서 때로는 닭이, 때로는 참새가, 때로는 악어가, 때로는 공룡이 나오는 그런 경우에 가깝다고 할까? 올챙이에 영감받은 헤겔처럼, 나도 발롯 먹으며 되게 할 일 없어 생각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