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턴트맨 출신 배우인 나의 장점은 역시 다른 배우들보다 몸을 잘 쓴다는 것. 그래서 캐스팅된 영화가 배광수 감독님의 <호야>다. 주인공 호야와 복싱 시합을 벌이는 선수 역을 맡았다. 물론 내가 져야 한다. 주인공 호야 역의 유연석과는 전에 다른 촬영장에서도 몇번 합을 맞춰본 터라 촬영이 수월했다. 오랜만에 호흡 잘 맞는 배우와의 액션에 나도 신이 나서 주먹을 뻗어댔다. 그래서 하루 만에 내 촬영분량이 다 끝났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고 한달간 인도 여행을 다녀왔는데 제작부장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후시녹음하러 오라고. 대사는 없지만 나의 거친 호흡소리가 필요하다기에 묵직한 책임감을 가지고 냉큼 갔다. 녹음 전에 경기 영상들을 쭉 보았다. 내가 연기한 모습을 볼 때면 늘 아쉽지만 그래도 이번 결과물은 현장에서 신났던 만큼 큰 흠이 없어 보였고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배광수 감독님을 비롯한 관계자분들이 하나둘씩 이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진석이가 지는 역할인데 너무 잘해 보여. 결승도 아니고 예선인데.” “진석이가 저렇게 호야를 잘 패다가 호야가 판정으로 이기니까 뭔가 이상해.” 처음엔 칭찬인 듯싶었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복싱선수 출신인 나는 서울액션스쿨에서 스턴트맨으로 활동할 당시 복싱선수 역을 도맡아 했다. 드라마, 영화 할 것 없이 복싱선수 역을 맡은 지도 벌써 햇수로 8년째. 이런 내가 현장에서 NG라도 내면 여간 창피한 게 아니다. 실수없이 잘한다는 게 이런 엉뚱한 결과를 만들 줄이야. 후시녹음을 깔끔하게 끝냈지만 여론이 이런 식으로 확산되다가는 내 신이 통으로 없어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물론 개봉을 해봐야 알겠지만, 각오는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