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 1922~2010)의 소설 <리카르두 레이스의 사망연도>(1984)는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 1888~1935)라는 인물의 독특한 삶을 다루고 있다. 이 포르투갈 작가는 제 이름만이 아니라 다수의 다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곤 했다. 작가가 제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예는 흔히 있으나, 페소아의 예는 이런 일반적 경우와 확연히 구별된다. 이름들 각각에 서로 구별되는 고유한 전기와 인격과 문체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제 자신을 여러 개의 인격으로 분화시킨 셈이다.
그 이름들을 그는 ‘가명’(假名)이 아니라 ‘이명’(異名)이라 부른다. 가명(pseudonym)은 제 정체를 감추고 제 목소리를 낼 때에 사용하나, 자기의 이름들은 저마다 다른 인격을 갖고 있으므로 이명(heteronym)이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체성의 추구와는 반대되는 충동을 본다. 정체성(identity)이 ‘A=A’의 동일률에 집착한다면, 이명(heteronym)은 한 인격 내에 잠자는 상이한 가능성들을 현실화한다. 그것의 격률은 A=B=C=D=E, 즉 ‘너는 지금의 네가 아닌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페소아가 사용한 이명은 확인된 것만 해도 75개를 넘는다. 그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세개의 이름, 즉 알베르투 카에이로(Alberto Caeiro), 리카르두 레이스(Ricardo Reis), 알바루 데 캄푸스(Albaro de Campos)다. 위에서 언급한 사라마구의 작품은 이중 리카르두 레이스의 삶을 다룬 것이다. 흥미롭게도 사라마구의 소설에서 레이스는 페소아보다 1년 뒤에 죽는다. 자기가 자기보다 늦게 죽는 셈이다. 페소아의 사망 소식을 듣고 포르투갈로 건너간 레이스는 1년 뒤 페소아의 유령을 따라 그의 무덤으로 따라 들어간다.
세개의 인격과 세상의 모든 꿈들
페소아는 이명들 각각에 전기(biography)를 부여했다. 그가 최초로 사용한 이명 ‘알베르투 카에이로’는 1889년 4월16일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만 교육을 받은 뒤, 히바테주라 불리는 시골에서 목동으로 지내며 <양치는 사람들> <사랑에 빠진 목동> 등의 전원시를 쓴다. 1915년 고향 리스본으로 돌아오나, 채 몇달도 지나지 않아 폐결핵에 걸려 26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이 교육받지 않은 천재의 작품들은 사후에 <알베르투 카에이로 시 전집>으로 발간된다.
사라마구 소설의 주인공이 된 ‘리카르두 레이스’는 1887년 9월15일 포르투 출생으로, 제수이트 교단의 학교에서 집중적인 고전 교육을 받은 뒤 의과대학에 진학한다. 이 의사 시인은 호라티우스를 연상시키는 문체로 시를 썼으며, 비평에도 손을 대어 자기가 흠모하는 목동 시인 알베르투 카에이로에 관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왕당파였던 그는 포르투갈의 왕정이 무너지자 1919년 브라질로 거처를 옮긴다. 사망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라마구는 그의 사망연도를 페소아가 죽은 다음 해인 1936년으로 설정했다.
알바루 데 캄푸스는 1890년 10월15일 타비라에서 출생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조선공학을 공부한 뒤, 항해술로 전공을 바꾸어 글래스고에서 항해사로 생활한다. 삶의 무의미함에 지루함을 느낀 이 퇴폐주의자는 모험을 좇아 극동지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힘을 찬양하는 미래주의적 경향의 시를 쓴다. 특히 기계와 석탄과 강철에 대한 그의 집착에는 에로틱한 측면이 있다. 1922년 이후 영국으로 이주. 사망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세개의 전기는 또한 세개의 세계관을 함축한다. 목동 시인 카에이로는 세계를 정신이 아니라 육안으로 본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판단중지라 할까? 그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세계를 바라보는 야성적 시각. 그 속의 모든 것에 대한 천진한 경외. 여기에 그의 독창성이 있다. 세상에 대한 일체의 정신적 해석, 일체의 문학적 가공을 거부하기에 그의 시는 자연스레 반시(反詩)의 경향을 띤다. “나는 야망도 없고,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되는 것은 나의 야망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홀로 존재하는 나의 방식일 뿐이다.”
의사시인 레이스는 스승 카에이로를 본받아 세상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삶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봐라. 절대로 거기에 물음을 던지지 마라. 그게 너에게 말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교육을 받지 못한 카에이로와 달리 레이스는 이런 태도를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쾌락주의로까지 끌어올린다. “머리칼에 부는 신선한 바람을 느끼고, 태양이 나뭇잎 위에서 강렬히 빛날 때에, 나는 더이상 요구할 것이 없다. 운명이 내게 허락하는 것 중에서 이처럼 무지의 순간에 감각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삶보다 더 좋은 것이 있던가?”
엔지니어 시인 알바루 데 캄푸스는 격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그의 인격 속에는 두개의 대립되는 충동이 들어 있다. 하나는 모든 것을 모든 방식으로 느껴보고 싶은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 봤자 그 모든 것이 결국 부질없다는 무상함의 느낌이다. 그의 성정은 끊임없이 이 대립되는 두 극단 사이를 격렬하게 오간다. 물론 그때마다 그의 시 세계 역시 달라진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 어떤 것도 되고 싶지 않다. 나는 그 어떤 게 되기를 바랄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내 안에 세상의 모든 꿈들을 다 갖고 있다.”
존재의 모든 가능성을 실현하다
이 세개의 인격은 물론 페소아 자신 속에 들어 있는 성향들의 발현일 것이다. 이 세 이름 외에 페소아는 자기 이름(orthonym)으로 글을 썼다. 흥미로운 것은 이 ‘페소아 자신’이 사실은 그가 사용하는 또 다른 이명(heteronym)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가 ‘페소아’라는 이름으로 글을 쓸 때조차 그 페소아는 현실의 페소아와는 구별된다. ‘페소아 자신’은 나머지 세개의 이름처럼 그의 한 측면만을 구현한 허구의 인물일 뿐이다. “시인은 위조범이다. 연기에 능한 그는 심지어 자기가 진짜로 느끼는 고통까지도 위조한다.”
이는 보르헤스의 단편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그는 메타적 관점으로 올라가 자신을 1인칭과 3인칭(‘보르헤스와 나’)으로 이중화한다. “몇년 전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나는 근교의 신화들로부터 시간과 영원성의 놀이로 관심을 옮겼다. 하지만 그 놀이들도 이제는 보르헤스의 것이 되었기에 나는 다른 것들을 상상해야 한다. 내 인생은 결국 비행이다.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은 망각, 혹은 그에게로 귀속된다.” 단편은 간략하나 매우 인상적인 문장으로 끝난다. “이 글을 그 둘 중 누가 썼는지 모르겠다.”
‘정체성’은 나를 하나의 가능성에 묶어놓고 다른 모든 가능성들을 억압한다. 반면, ‘이명’은 자아를 다중화하여 존재의 모든 가능성들(때로는 서로 모순되는)을 실현하려 한다. 본명(orthonym)조차 이명(heteronym)으로 사용할 때, 놀이는 더욱더 급진적으로 변한다. 내가 더이상 내가 아닐 때 ‘근대적 주체’의 관념은 해체되고, 우리는 마침내 정체성이라는 근대적 강박에서 해방된다. 내가 더이상 내가 아닐 때, 나는 나보다 늦게 죽을 수도 있다. 사라마구가 하필 <리카르두 레이스의 사망연도>를 소설 제목으로 뽑은 것은 그 때문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