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다시 보기 어려운 명배우가 했던 역에 도전하는 느낌이에요. 부담감이요? 시작하면서도, 끝나고 나서도, 지금 이 순간도 느끼는 감정이죠."
배우 정재영은 5일 기자와 만나 웃고는 있지만 속은 타들어가는 것 같다며 이처럼 말했다. 영화 '이끼' 개봉(14일)에 앞서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가진 인터뷰 자리에서다.
강우석 감독의 '이끼'에서 그는 류해국(박해일)의 대척점에 있는 천용덕 이장 역을 맡았다. 인터넷 만화인 원작(윤태호 작)에서 마을의 비밀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비중 있는 캐릭터다.
"연기하면서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았던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원작 부담에 짓눌렸죠. 제가 잘할 것 같은 자신감도 처음에는 별로 없었습니다."
애초 강우석 감독으로부터 천 이장 역을 제안받았을 때부터 그는 머뭇거렸다고 한다.
나이 마흔에 불과한 자신이 앞머리가 벗겨진 백발노인 역을 연기해야 한다는 어색함, 원작의 카리스마를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습한 탓이다.
"제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터넷에서 원작 팬들의 아우성이 이어졌죠. 감독님의 강력한 권유와 지지가 없었다면 아마 연기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예요."
어렵게 결심한 끝에 촬영을 시작했지만 촬영 자체도 녹록하지 않았다. 삭발하고 나서 가발을 써야 했고 진한 메이크업도 해야 했다. 무엇보다 "두꺼운 화장 때문에 표정이 제대로 나오는지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원작과의 비교는 어쩔 수 없이 그가 뛰어넘어야 할 벽이었다. 부담감을 털어내기 위한 전략은 천 이장을 자기 방식으로 변주하는 것.
그는 강 감독의 도움을 받아 추상적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원작의 천 이장을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엉뚱한 인물로 표현했다. 여기에 정재영만 할 수 있는 특유의 유머를 곁들였다. 정재영의 천 이장이 원작의 냉소적인 성격을 품에 안으면서도 독특한 유머를 보여주는 이유다.
"만화보다는 평범하고 있을 법한 인물이 영화 속 천 이장이죠. 어떻게 보면 원작보다 밋밋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도 감독님도 그래야 한다고 믿었어요. 추상적이기보다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번 영화로 속앓이를 많이 한 듯 보이는 정재영. 그는 이제 어엿한 중견 배우다. 1996년 '박봉곤 가출사건'으로 영화에 데뷔한 이래로 약 20편에 이르는 영화에 출연했다.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실미도'(2003) 등을 통해 강한 인상을 각인한 그는 '아는 여자'(2004)에서 연민을 주는 동치성 캐릭터로 충무로의 시선을 끌었다.
이후 그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나의 결혼 원정기'(2005), '거룩한 계보'(2006), '바르게 살자'(2007), '강철중:공공의 적 1-1'(2008), '신기전'(2008), '김씨 표류기'(2009), '이끼'(2010)까지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며 경력을 쌓아왔다.
이중 '이끼'는 특별한 작품이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처음일뿐만 아니라 제작비(80억원)나 캐스팅의 규모 면에서 그가 출연한 영화 중 규모가 가장 크기 때문이다.
하반기 최고 기대작 중 하나인 '이끼'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후한 편이다. 항간에는 500만 혹은 800만 관객까지 동원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다.
대다수 배우가 바라는 흥행배우. 이른바 1천만 관객을 모은 배우에게 주어진다는 '1천만 배우클럽'에 그도 들고 싶어할까.
"1천만명이 든다면 10만명이 든 것보다는 당연히 좋겠죠. 하지만, 1천만명 동원을 목표로 연기하지는 않습니다. 배우에게 더 중요한 건 전문가나 대중들의 평가죠. 연기를 못 했는데 1천만이 들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저 부끄러운 연기를 1천만명이나 봤다고 생각하면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 싶을 거예요."
그가 한 역할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캐릭터들을 꼽아달라고 주문하자 '공공의 적'이나 '거룩한 계보'에서 선보인 강한 캐릭터보다는 무언가 부족해 보이는 '아는 여자' '나의 결혼 원정기' '김씨 표류기'에 나온 캐릭터가 더 마음에 든다고 했다.
배우생활 만 14년차를 맞은 정재영에게 요즘은 연기와 관련해 어떤 고민을 하는지 물어봤다.
"20대 때는 연기와 예술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글쎄요. 매일 매일 바뀌는 것 같아요. 연기를 잘하면 좋겠지만, '성격 모났다'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잘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남을 행복하게 하려고 연기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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