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다.
올 상반기 안방극장 미니시리즈 드라마들의 시청률 가뭄 속에 '추노'에 이은 히트작이 3개월 만에 탄생했다. 지난 24일 방송 6회 만에 시청률 30%를 돌파한 KBS 2TV '제빵왕 김탁구'(극본 강은경, 연출 이정섭)다.
1970~1980년대를 배경으로 제과기업의 서자로 태어나 구박 끝에 집에서 내쫓긴 김탁구가 온갖 역경을 딛고 제빵업계의 장인으로 거듭나는 이 이야기는 '막장'을 무색하게 하는 '통속'의 힘으로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다.
불륜, 패륜, 납치, 강간 등 막장 드라마로서의 요인을 고루 갖췄지만 배경이 되는 시대가 무례했기에 그 과격함을 희석시키고 있는 이 드라마는 낯익은 석세스(success) 스토리임에도 통속극의 파워를 새삼 보여주고 있다. 딱히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지만 짜임새 있는 구성과 탄탄한 내러티브, 아역부터 중견연기자까지의 고른 호연이 어우러지며 130억 원이 투입된 전쟁 블록버스터인 MBC TV '로드 넘버 원'과 어두운 멜로인 SBS TV '나쁜 남자'를 여유롭게 따돌리고 있다.
◇복수는 없다..'착한 사람이 이긴다'는 판타지 자극 = 거성식품의 구일중(전광렬 분) 회장은 보모 김미순(전미선)과의 사이에서 아들 탁구(오재무, 윤시윤)를 낳고, 구 회장의 아내 서인숙(전인화)은 남편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없다는 점괘를 믿고 남편의 비서 한승재(정성모)와의 사이에서 아들 마준(신동우, 주원)을 낳았다.
홍여사(정혜선)는 며느리 서인숙과 한승재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서인숙과 다투다 넘어져 머리를 다치는데 서인숙과 한승재가 이를 방치해 숨을 거뒀다. 한승재는 탁구 엄마인 김미순을 위협하기 위해 강간을 사주하고 구 회장은 무슨 의도인지 사람을 시켜 김미순의 납치를 시도했다.
현대극에서 이런 내용이 펼쳐졌다면 대번에 '막장 드라마'라는 비난의 포화를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역과 시대극이라는 우산은 꽤 쓸만했다. 주연을 맡은 성인 배우들이 등장하기 전 6회까지는 천진난만한 아역 배우들이 활약했는데 이것이 '그땐 그랬지'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1970년대를 배경으로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비난을 희석시켰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는 복수 코드가 없다. 막장 드라마의 핵심인 복수 코드가 없는 대신에 '착한 사람이 이긴다'는 판타지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24일 방송에서도 탁구는 우연히 만난 팔봉선생(장항선)에게 "우리 어무이가 착한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라고 했는데예 참말로 그 말이 맞습니꺼?"라고 물었다. 그러자 팔봉선생은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니가 그러길 원하면 그런 세상이 맞을 게야"라고 인자하게 답했다.
순진무구한 탁구가 '착한 사람이 이긴다'고 철석같이 믿고서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에 대한 미움을 키우지 않는 모습은 시청자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탁구를 잘해서 김탁구가 아니라, 높을 탁(卓), 구할 구(求)라 김탁구"라는 대사가 자막과 함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 역시 이 드라마가 권선징악을 내세운 통속적 스토리임을 강조한다.
◇빠르다..무거운 어린시절 거쳐 유쾌ㆍ발랄한 청년시대 = 스피디한 전개 역시 '막장'을 상쇄하고 있다.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숨 돌릴 틈 없이 휘몰아치면서 마치 액션 영화를 보는 듯한 긴장감과 흥미를 유발한 것.
어린 탁구는 엄마가 실종되고 거성식품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지만 슬퍼만 하거나 누구를 미워할 겨를 없이 쑥쑥 성장했다. 다른 이에게는 엄청난 트라우마가 됐을 일들도 매사 긍정적인 탁구에게는 성장의 자양분으로 작용해 단단하고 건강한 청년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탁구의 소꿉친구 유경(조정은, 유진)이 학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보육원으로 떠나면서 편지에 쓴 "우리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지나가지만 먼 훗날 우리가 어른이 됐을 때 웃는 얼굴로 꼭 다시 만나자. 그때가 되면 난 아주아주 행복해 있을 테니까"라는 말로 드라마는 주인공들의 비참했던 어린 시절도 어느새 과거가 됐음을 선언했다.
그리고 6회 말미 '12년 후'로 건너뛴 드라마는 유쾌하고 발랄하며 건강한 청년 탁구를 등장시키며 운명을 씩씩하게 개척해나갈 성인 탁구에 대한 기대감을 안겨줬다.
◇아역부터 중견 연기자까지 맛있는 연기의 향연 = 시대극의 성패는 아역배우들이 좌우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드라마에도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어린 탁구 역의 오재무(12)는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으로, 명랑하고 건강한 주인공의 모습을 탁월하게 표현해냈다.
또 전광렬, 전인화, 정성모, 전미선 등 중견 연기자들에게서는 내공이 번쩍번쩍 뿜어져 나와 스피디한 전개와 어우러져 시종 극에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전인화는 자신이 분한 서인숙이 큰딸에게 "재수 없게 여자가 설쳐대면 될 일도 안 되는 거 몰라? 그게 세상이야"라고 냉소적으로 말하는 모습을 통해 서인숙이 악녀지만 예의 없는 시대에 자존을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음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이 드라마의 제작발표회에서 "대본을 보니 사람의 향취가 짙게 묻어났다. 외람된 말이지만 내가 지금껏 선택한 작품이 실패한 경우가 없다. 이번 작품도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자신감을 표시했던 전광렬은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KBS 이응진 드라마국장은 "'제빵왕 김탁구'는 구조적으로 내러티브가 아주 잘 짜여졌다는 강점이 있다"며 "통속적이라고 지적하는데 과거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는 어떤 시대극이라도 통속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KBS는 지난해 '아이리스' 이후 '추노'와 '신데렐라 언니'를 거쳐 '제빵왕 김탁구'까지 지난 8개월간 수목 미니시리즈 드라마를 잇달아 성공시키고 있다. 장르는 각기 달랐지만 네 작품 모두 내러티브의 힘을 보여주며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달렸다.
이 국장은 "앞서 방송된 '아이리스'와 '추노' '신데렐라 언니'가 모두 새로운 이야기였기 때문에 '제빵왕 김탁구'의 통속성이 지금 통하는 면도 있다"며 "KBS의 편성 전략도 주효했다"고 말했다.
prett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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