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에서 결국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건 한방의 강력한 어퍼컷이 아니라 가벼운 잽이다. 팔을 곧게 뻗어 가볍게 날리는 잽처럼 우리 모두 모여 초저예산으로 가볍게 일기 쓰듯이 영상를 찍어보자. 우리는 잽 필름이다. 비싼 돈 내고 영화과를 졸업한 뒤 방바닥에서 트리플악셀로 뒹굴던 나를 비롯한 지언태, 김영관(동기다. 모이면 술 먹고 누가누가 더 처량하고 힘든지 신세한탄 대회가 열린다)과 함께 만든 비공식 불법 초저예산 소규모 영화제작모임이다. 최소인원으로 돈없이 툭, 그래, 시간날 때마다 습관처럼 찍어보자. 우린 아직 아마추어니까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리고 정말 나가서 찍었다. 시작은 상큼했다. 우리가 제작한 초단편영화 두편이 그해 구로시에서 열린 초단편영상제에 상영됐다. 남들이 보기엔 악 소리 날 만큼 대단한 성과물도 아니고 셋 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제 상영 경험이 처음도 아니었지만 우리 셋의 취지와 파이팅으로 만든 영화가 상영되니 그 짜릿함은 채치수가 스크린을 걸어주면 송태섭의 패스 그리고 이어지는 정대만의 석점만큼의 카타르시스를 우리에게 전해줬다(요즘 <슬램덩크>를 다시 본다).
일년 뒤… 우린 지금 멈춰 있다. 각자 작업에 시달리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사랑에 시달리고 로버트 맥기에 시달리고 소녀시대에 시달리고 메시에 시달리고 호날두에 시달리며 술 먹고 위닝을 했다. 우리가 생각한 만큼 권투의 잽처럼 습관적으로 영상을 만든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뭐 다 이유가 있었지만 그건 일단 핑계로 판정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로드리게즈가 한 말인지 스필버그가 한 말인지 친구가 지어낸 말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확실히 기억나는 그 말이 내 귀를 때린다. “영화를 하고 싶으면 카메라를 들고 나가서 찍어라.” 게을렀다. 게을렀다. 게을렀다 트리플…. 이러다 잽도 안되겠다. 다시 한번 날려보자 잽. 이 글을 쓰게 돼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