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세부에는 아주 오래된 성당이 있다. 제대로 된 박물관이나 미술관 하나 없는 세부에서 마젤란이 상륙할 때 가져왔다는 십자가와 더불어 거의 유일하게 문화유산의 행세를 하는 것이 바로 ‘산토리뇨’라 부르는 이 성당이다. 이 성당에서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이곳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꼬마 예수가 아니라 ‘블랙 마리아’라 부르는 검은 피부의 마리아 상이었다. 블랙 마리아는 특히 지중해 유역에 널리 퍼져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것이 식민모국인 스페인을 통해 필리핀까지 흘러들어온 모양이다.
블랙 마리아는 과거에 지중해 지역에서 일어난 문화적, 종교적 혼합의 흔적이다. 원래 지중해 지역은 이집트 문화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훗날 그곳에 기독교 문화가 흘러들어오면서 원래 그곳에 있었던 토착 종교에 새로 들어온 외래 종교가 착종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접붙이기를 통해 두 식물의 특성을 동시에 가진 과일을 얻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블랙 마리아’는 바로 그 착종과 융합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블랙 마리아의 검은 피부는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Isis)가 남긴 흔적이라는 얘기다.
사실을 말하자면 성모 마리아 자체도 실은 종교적 융합의 산물이다. 기독교가 처음 유럽에 도착했을 때 유럽은 다신교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을 토착민의 다신교에 접목시키기 위해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자 숭배를 허용했다. 게다가 로마 이외의 지역은 모신(母神) 숭배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이와 타협하기 위해 교회는 모성을 가진 신성의 대리역으로 마리아를 내세워야 했다. 문화적 순혈주의자들의 생각과 달리 문화는 이처럼 이질적인 것들의 융합을 통해 탄생하곤 한다.
크레타인의 단결
기독교가 수입되기 이전에도 지중해 지역에는 정복당한 이집트 문명과 정복자인 헬레니즘의 융합 현상이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혼합주의는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가령 신학자 하비 콕스는 한국에서 기독교가 성공을 거둔 바탕에는 샤머니즘이 깔려 있다고 지적하지 않았던가. 브라질에는 노예들이 가져온 아프리카 토착 종교와 주인들이 가져온 유럽 종교가 뒤섞인 혼합 종교들이 많다고 들었다. 이렇게 이질적인 종교나 문화가 하나로 합쳐지는 현상을 흔히 ‘싱크레티즘’(syncretism)이라 부른다.
싱크레티즘은 ‘함께’(syn)와 ‘크레타’(creta)의 결합어 뒤에 ‘주의’(ism)라는 말을 덧붙인 것으로, 그 어원은 고대 크레타섬의 주민들이 외적의 침입에 맞서는 독특한 방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의 크레타섬에는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체제를 달리하는 수많은 부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평시에는 서로 차이를 존중하며 공존하다가 거대한 외적을 만나면 종교적, 정치적 가치관의 차이를 접고 공동의 전선을 형성했다고 한다. ‘싱크레티즘’은 크레타의 부족들이 실천했던 이 공동행동의 원칙을 가리킨다.
이것이 꼭 크레타만의 방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상설적인 시스템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지만, 크레타 외에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들도 종종 외적의 침입에 맞서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체제의 차이를 넘어 하나로 단결하곤 했다. 영화 <300>에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300명의 친위대를 이끌고 거의 자살에 가까운 전투를 벌인 것도 실은 ‘싱크레티즘’의 실현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레오니다스와 300용사의 희생으로 헬레니즘의 형제국들은 결국 페르시아에 맞서 연합군을 형성하게 된다.
강요된 동일성이라는 폭력
근대국가는 시민들에게 이른바 ‘정체성’을 요구한다. 국가는 교육과 훈육을 통해 시민들의 신체에 동일한 코드를 각인하고, 그것으로 정상/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을 삼으려 한다. 정체성이라는 이름의 동일성에서 벗어나는 개인은 종종 비국민, 심지어는 반국가분자로 간주된다. 최근 참여연대에서 유엔안보리에 천안함 관련 서한을 보내자,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이적행위’로 규정하며 국보법으로 단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해프닝은 정체성(=동일성)이란 것이 때로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하지만 정체성의 폭력이 보수주의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가령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했던 진보신당의 노회찬 후보는 온갖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이참에 진보정당을 해산시켜야 한다는 극단적 언사까지 나돌았다.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지 않으면 졸지에 ‘반민주분자’, ‘한나라당 2중대’라는 죄목을 뒤집어쓰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성난 머리는 지난 총선에선 거꾸로 민주당 후보가 완주하는 바람에 심상정, 노회찬 후보가 떨어지고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된 바 있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한다.
정체성의 폭력은 당연히 진보정당 내에도 존재한다. 심상정 후보가 사퇴를 하면서 진보정당들 사이의 ‘진보대연합’을 주장하자, 당내에서는 이것이 좌파의 정체성을 흐리는 행위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이견을 그저 이견으로 받아들여 차분하게 토론을 한다기보다는 이견을 제출하는 것 자체를 당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해당행위로 간주하는 분위기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토론에나 붙이자고 말하는 것조차도 해당분자의 편을 들어주는 행위로 간주된다.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정체성의 폭력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진정한 싱크레티즘이란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할수록 가치는 다양해지게 마련이고, 진보의 가치들이 분화를 겪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망조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문제는 다양한 가치의 지향을 간단히 ‘사표’로 만들어버리는 선거제도에 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이번 선거에서 야권은 ‘선거연합’의 전략을 발전시켰다. 선거연합의 실현은 우리 사회에 ‘싱크레티즘’의 사고가 자리잡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연합이 진정한 의미의 ‘싱크레티즘’이었는지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반MB’라는 명분 속에서 민주당은 손쉽게 승리를 챙겼다. 민주노동당이 공동으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나, 그것은 사실 민주당이 흘려준 떡고물을 받아먹은 데에 지나지 않는다. 반MB라는 부정적 가치는 실현되었지만 ‘진보’라는 긍정적 가치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독자후보를 낸다고 욕을 뒤집어쓰는 분위기이니, 다음 총선이나 대선에선 과연 진보 후보가 명함을 내밀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거 끝나고 진보신당을 향해 퍼부어졌던 그 모든 부당한 비난들 역시 ‘선거연합’이 실은 자발적 싱크레티즘이라기보다 강요된 동일성에 가까웠음을 말해준다. 싱크레티즘은 먼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되 행동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싱크레티즘의 요체다. 같은 일을 하기 위해 굳이 가치관을 일치시킬 필요는 없다. 생각이 달라도 얼마든지 같은 일을 할 수가 있다. 진정한 의미의 싱크레티즘은 공동의 대의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싱크레티즘이 그저 제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에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의 존재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또 상대가 내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가 나의 존재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다. 싱크레티즘은 정체성의 횡단과 교차를 허용하고 장려한다. 싱크레티즘에 참여하는 우리는 순혈주의의 아집을 버리고 모두 블랙 마리아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