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저서 <회화 속의 진리>에는 ‘파레르곤’이라는 제목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파레르곤’이란 ‘주변’을 의미하는 ‘파라’(para)와 ‘작품’을 뜻하는 ‘에르곤’(ergon)을 합친 말로, 주요한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어떤 저자의 주변적 저작을 가리킬 수도 있고, 작가가 주작을 만들기 위해 제작한 작은 소품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미술에서라면 작품의 주변을 이루는 요소, 즉 작품을 감싸는 액자 같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 아무튼 위에 언급한 글에서 데리다는 ‘파레르곤’을 이렇게 정의한다.
“파레르곤: 작품(ergon)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품 바깥(hors d'œuvre)도 아니고,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니고,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대립을 뒤흔드나, 그렇다고 비결정적인 것으로 남지 않고 작품을 발생시킨다.” 우리가 벽을 바라볼 때 액자는 그림에 속하나, 우리가 그림을 바라볼 때 액자는 벽에 속한다. 한마디로 액자는 작품의 안도 아니고 작품의 밖도 아니다. 그렇다고 작품인 것도 아니고, 작품이 아닌 것도 아니다(클림트와 같은 화가는 아예 그림을 그릴 때에 액자의 장식 효과를 함께 고려하곤 한다). 그것은 안과 밖, 위와 아래의 대립을 무력화시키면서 동시에 작품을 발생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여기서 “액자 없는 그림도 있지 않느냐”고 항변한다면, 액자를 ‘프레임’이라는 역어로 바꿔놓자.
액자 전시회
2년 전에 한 작가가 서울에서 손수 제작한 액자의 전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뭔가 ‘모던’한 측면이 있다. 우리가 그림을 볼 때, 질료는 투명해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이 실은 바른 물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20세기 초의 모더니스트들은 매체성에 주목했다. 그들의 작품은 회화 자체를 이루는 요소, 즉 형태와 색채로 돌아간다. 고전회화에서 우리가 인물과 정물과 풍경을 보았다면 현대 회화에서 우리는 캔버스 위에 특정한 형태와 색채로 바른 물감을 볼 뿐이다.
액자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전시회에서 그림을 볼 때, 우리는 액자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것이 고전적인 구상화든 현대적인 추상화든 액자를 보러 미술관에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그동안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요소에 주목하게 한다는 점에서, 액자 전시회의 컨셉은 모더니즘 회화의 전략과 통하는 데가 있다. 한 가지 유감이 있다면 그 전시회가 액자 자체를 한 장인의 독자적 작품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유사 조각 작품으로 제시하는 데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보다 흥미로운 것은 독자적인 작품으로 자립하지 않은 액자의 역할이다. 액자의 역할은 그것이 걸려 있는 벽면의 특정 부분을 미적 영역으로 구획시켜주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세속을 떠나 액자 안의 미적 환영 속으로 몰입할 때, 액자는 의식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액자에 주목하는 순간, 환영은 깨진다. 작품은 이제 미적 영역에서 나와 세속적 영역으로 들어가 무게를 달거나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있는 물건, 즉 미술품이 된다. 액자가 제 기능을 발휘할 때 그것은 스스로 제 존재를 지운다.
‘파레르곤’이 데리다 자신이 글을 쓰는 방식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데리다의 특성은 종종 사상가들의 주요한 저작이 아니라 그들의 주변적 저작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데에 있다. 놀라운 것은, 하찮게만 보이는 그 주변적 텍스트를 통해 저자의 사상에 대해, 혹은 저자가 속한 시대에 대해 더 놀라운 통찰을 얻어낸다는 데에 있다. 숲의 한가운데를 지나갈 때에는 숲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숲의 가장자리로 나오면 비로소 숲의 전모가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까?
이렇게 눈에 띄지 않는 주변이 때로는 눈에 띄는 중심보다 더 많은 것을 보게 해준다.나 역시 괜찮은 통찰은 미학서가 아니라 외려 미학의 언저리에서 얻곤 한다. 가령 미적 취향이라는 것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게 된 것은 정작 미학사 책이 아니라,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을 통해서였다. 중세의 호전적 전사들이 국정의 가신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귀족적 취향의 섬세함을 얻게 되었고, 그것이 훗날 ‘미적 취향’의 바탕이 되었다는 얘기는 그 어떤 미학사 책에도 나오지 않는다.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닌 것. 그리하여 외부에 있으면서도 은밀히 내부에 간섭하는 것. 그것이 ‘파레르곤’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작품을 발생시킨다”는 데리다의 말이다. 파레르곤이 작품을 발생시킨다는 건 무슨 뜻일까? 저자들은 종종 주저(ergon)를 쓰기 전에 그 주제에 관련된 짧은 글들(parergon)을 쓰곤 한다. 주저가 완성되면 스케치에 불과한 이 주변적 텍스트들은 간단히 망각되고 만다. 하지만 에르곤은 바로 이 파레르곤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부에 간섭하는 외부
르네상스의 거장 알베르티는 회화를 “자연을 내다보는 창”이라 불렀다. 가령 풍경화가 벽에 걸려 있을 때, 우리는 마치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액자는 벽면의 일부를 구획지어 그것을 이 미적 환영의 공간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액자, 즉 파레르곤은 작품, 즉 에르곤을 발생시킨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액자’란 물론 물리적 객체로서 액자만이 아니라, 동시에 관념적인 사각의 틀로서 프레임을 가리킨다. 어차피 영어로는 액자를 ‘프레임’(frame)이라 부르지 않던가.
프레임은 그림에 속하지 않으나 그림의 성립에 본질적으로 간섭한다. 풍경화는 그저 자연에 존재하는 풍경을 사각의 프레임으로 잘라낸 것이 아니다. 풍경을 프레임에 담을 때, 사각형은 그림의 내부 요소들을 조직하는 구성의 원리로 작용한다. 심지어 사진작가들도 그저 현실을 사각의 틀로 잘라내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다. 사진이 사각형이라는 사실- 그것은 아마 회화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리라- 은 피사체나 촬영각도의 선택에 이미 간섭해 들어간다. 이렇게 파레르곤은 에르곤을 발생시킨다.
작품의 외부에 있으면서도 작품의 내적 구성에 관여하는 것, 즉 파레르곤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에르곤의 가장 내밀한 본질을 이해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가령 회화나 사진에 대한 깊숙한 통찰은 외려 주변적으로 여겨지는 것, 즉 프레임이 그것들의 구성에 어떻게 간섭하는지 관찰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데리다식 글쓰기의 섹시함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주변적인 텍스트들(parergon)을 분석함으로써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주저(ergon)의 본질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데에 있다.
프레임의 완고함
그림이나 사진이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종종 프레임이라는 외적 요소가 얼마나 깊숙이 내적 구성 원리로 작용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몇몇 작가들이 르네상스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 시각의 관습을 관객에게 의식시키기 위해 4각의 프레임을 파괴하는 다양한 실험들을 해왔다. 프레임을 전복하려는 실험영화의 여러 시도들, 프레임에 전쟁을 선포한 피터 그리너웨이의 실험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관객은 여전히 영화가 프레임 안에 갇혀 있기를 원한다. 환영에 빠지기를 포기하고 파레르곤을 의식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치의 본질을 제대로 보려면, 중심이 아니라 주변을 봐야 한다. 에르곤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파레르곤이다. 하지만 대중은 물론이고, 제법 진보적이라는 매체들도 이 지배적인 프레임의 역할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 프레임이 정치의 내적 구성을 어떻게 결정하는지 눈을 감고, 프레임에 갇혀 환영을 재생산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런 나라에서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것은 할리우드의 대중이 프레임을 포기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똑같다. 이 나라에서 진보정치는 거의 실험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