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즈음, 동네 구석에 위치한 비디오가게를 힐끗거리다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진열장에는 그저 그런 쌈마이 액션영화들의 포스터와 비디오 몇개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를 사로잡았다. 얼짱쭉빵 언니가 훌러덩 벗은 야한 비디오 때문이 아니다. 큰 가위에 목이 잘리고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이 담긴 스틸 때문이다. 세상에 저런 멋진 영화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며 공포에 지배된 여성의 표정과 커다란 눈동자가 미학적으로 와닿았다. 그 영화를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얼마 뒤 소원을 풀었다. 대단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마음을 끄는 뭔가가 있었다. ‘삐짜’ 비디오를 거쳐 정식 비디오(정식 유통일 리는 없겠지만), 그리고 DVD까지 거치며 그 영화에 나도 모를 애정을 쏟았다. 그 강렬한 비주얼을 담은 스틸의 주인공은 제스 프랑코의 <블러디 문>이다. 제스 프랑코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는 수많은 가명을 사용하면서 엄청난 다작을 쏟아냈고, 하나같이 자극적이며 음란했고, 화면을 붉은 피로 물들이는 데 공을 쏟았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왕성한 창작 활동 덕분에 좋건 싫건 그가 만든 몇편의 영화를 볼 수밖에 없다. 수십개의 가명으로 장르영화를 찍어내니 피할 재간이 없다.
<블러디 문>은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의 이름은 미구엘. 훤한 대낮에 밖으로 나다니기에는 얼굴이 끔찍하다. 그는 매일매일 자신의 흉측한 외모에 상처를 받고 스스로를 학대한다. 그는 밤의 그늘로 숨지만, 보름달이 뜨면 고통을 받는다. 그런 미구엘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누이 미누엘라는 동생에게 파티에 몰래 참석할 것을 권한다. 하나 가면을 쓰면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단순한 생각은 큰 사건으로 이어진다. 파티장에서 가면을 쓴 미구엘을 남친으로 오해한 여자가 방갈로에서 훈훈한 놀이를 하다 그만 가면을 벗긴 것. 비명과 저항에 흥분한 미구엘은 여자를 살해한다. 5년 뒤 미구엘은 정신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또 다른 살인행각을 벌인다.
30년이란 세월의 케케묵은 공포영화지만, 오히려 오늘날 더 잘 먹힐 소재다. 현대는 외모가 생존에 필요한 강력한 무기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외모지상주의는 심각한 사회드라마와 개그, 영화 소재로 널리 활용된다. 특히 공포영화의 훌륭한 재료감이다. <블러디 문>은 이를 적절하게 차용했다. 외모로 인한 자기 학대가 연쇄살인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촘촘함과는 거리가 멀고 대충 묘사하고 생략함에도 불구하고 미구엘의 내면적인 상처가 와닿는 것은 소재가 주는 힘이 크게 작용한 탓이다. 따지고 보면 <블러디 문>은 80년대를 주도했던 난도질 영화들의 창궐과 때를 같이한다. 하지만 할리우드산 난도질 영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서툴지만 캐릭터에 대한 묘사와 드라마 비중이 높다. 대개 이런 영화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르고 썰며 피를 짜낸다. 하지만 <블러디 문>은 살인이 아닌, 드라마에 무게를 둔다. 호불호가 갈릴 만한 선택이다. 미구엘의 반복되는 살인행각 과정에 미스터리 성격을 가미했고, 극이 진행되면서 밝혀지는 미구엘과 누이 미누엘라와의 숨겨진 비밀은 의외의 재미가 있다. 화끈한 난도질은 없지만, 톱니바퀴로 목을 따주는 팬서비스는 더러 나온다.
<블러디 문>은 하나의 관문처럼 통과해야 하는 제스 프랑코(극중 의사로 출연까지 했다)의 영화 세계에서 손꼽을 만한 영화는 아니다. 하나 유럽 공포영화 보기가 어려웠던 시기, 가뭄의 단비처럼 갈증을 해소시킨 영화 중 한편임에는 틀림없다. 잘 만들건 못 만들건 중요하지 않다. 추억 속에 자리잡은 영화는 그 어떤 명작보다 소중하다. 아주 가끔 보름달을 대하면 미구엘의 모습을 떠올린다. 허접하지만 매력적이었던 <블러디 문>을 보고 난 뒤 생긴 버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