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여성을 위한 채용 공고에 ‘용모단정’이라는 표현이 끼어들곤 했다. 물론 ‘옷매무새가 깔끔하다’는 뜻이 아니다. 여성단체의 활동 때문인지, 이 용모에 따른 차별 공고는 요즘 보기 힘들어졌다. 우연히 ‘루키즘’에 관한 어느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의 논문을 읽었다. 인간의 두뇌는 깔때기 같아서 어떤 주제어를 입력해도 결론은 늘 똑같게 마련. 읽다가 지루해서 바로 결론으로 넘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외모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기 위한 그 어떤 정부의 개입에도 반대한다는 내용이다. 세상 참 편하게들 산다.
외모와 생산성, 상관관계 있나
94년에 발표된 어느 논문에 따르면, 잘생긴 남자는 평범한 남자보다 수입에서 5%의 프리미엄을 누리는 반면, 못생긴 남자는 평범한 남자보다 9%의 불이익을 보는 것으로 조사됐다. 흔히 여성들이 외모에 따른 차별로 고통을 더 많이 받는 것으로 생각하나, 조사에 따르면 못생긴 여성의 경우 4%의 불이익만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못생긴 여성들은 혼인을 통해 또 다른 불이익을 본다. 그들의 남편은 평균적 여성들의 배우자보다 교육 기간이 1년 정도 짧은 것으로 조사됐다. 물론 그들의 연봉도 그만큼 낮을 것이다.
‘루키즘’은 결국 외모에 따른 차별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든 남성이든 능력에 따라 차별대우를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공정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업무 능력과 전혀 관계없는 외모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진 ‘정의’의 관념에 위배된다. 하지만 외모가 생산성 향상에 도움을 준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그 경우 준수한 용모에 프리미엄을 주고, 못생긴 얼굴에 페널티를 주는 것은 적어도 부르주아 경제학적으로는 정당화될 것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위 논문의 저자들은 4년 뒤에 미국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다시 조사를 했다. 거기에 따르면 잘생긴 변호사들은 공공영역에서 일할 경우에는 평균보다 3200달러, 사적 영역에서 일할 경우에는 평균보다 10200달러 더 많은 수입을 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외모가- 적어도 특정 영역에서는- 생산성을 제고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얘기다. 물론 이 결과를 생산의 다른 영역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수의 고용주는 종업원의 외모가 생산성 향상과 직결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고 한다.
점점 비대해지는 상상계
루키즘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점증하는 유미화 현상이다.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소비자는 상품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 즉 상품 자체가 아니라 상품과 상품의 ‘차이’를 소비한다는 얘기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디자인, 이미지, 브랜드 등이다. 나아가 현대의 소비자는 상품을 일종의 내러티브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상품의 생산과 소비를 물리적 현상에서 미학적 허구로 바꿔놓는다. 일찍이 베냐민은 이를 “무기물의 섹스 어필”이라 불렀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은 언어적 영역에서 시각적 영역(이른바 visual communication)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른바 ‘스펙터클의 사회’(드 기보르)에서는 사건의 사실성이나 사물의 실용성보다는 그것들의 시각적 효과가 더 실재적이다. 텍스트가 하던 기능을 이미지가 대신하면서 정치적, 정치적 혹은 윤리적 아버지의 역할은 이제 미의 여신에게로 넘어간다. 사회는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도덕적 금지 대신 미학적 장려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못생기면 뭘 해도 죄가 된다’.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꾸어놓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마저 사고파는 상품이 된다. 이렇게 인간이 사물을 닮아가는 것을 마르크스는 ‘물화’(物化)라 불렀다. 이는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다. 후기산업사회, 혹은 산업 이후 사회에서 상품은 유미화, 허구화하고, 이는 다시 인간의 유미화, 허구화로 이어진다. “진리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예술”이라는 포스트모던의 유미주의는 사물과 인간 모두에게서 일어나는 유미화 현상의 이론적 반영일 것이다. 그 모든 급진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던은 자본주의와 공모관계에 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머나먼 고대에 일어난 어떤 사건의 반복일 뿐이다. 전설에 따르면 고대의 창기 프뤼네(Phryne)는 신성한 장소에서 옷을 벗은 죄로 법정에 기소된다. 당시에 신성모독은 사형에 처해질 만큼 중한 범죄였다. 하지만 그의 변호를 맡은 히페리데스는 마치 동상의 제막식을 하듯이 법정에서 갑자기 그녀의 알몸을 가린 천을 벗겨버린다. 드러난 알몸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배심원들을 향해 히스페리데스는 이렇게 외쳤다. “저것은 신적인 아름다움이다. 그 앞에서 인간의 도덕과 법률은 효력을 잃는다.”
여기에는 미학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던 그리스 문화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그리스인들의 이상은 선과 미가 명확히 분화되지 않은 채 결합된 ‘칼로카가티아’였다). 이 그리스적 특성이 오늘날 잘생긴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하고 수완도 더 뛰어날 것이라 느끼는 루키즘의 편견으로 반복되고 있다. 극단적인 경우 살인범도 ‘얼짱’이면 인터넷에서는 종종 경탄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현대인의 의식(혹은 무의식) 속에서 상징계는 축소되고 상상계가 비대해지고 있다.
이성주의자에게 또다시 찾아온 유미주의는 일종의 퇴행으로 여겨질지 모르겠다. 라캉에 따르면 유아는 거울을 통해 실재계에서 상상계로 입장하고, 이어서 상징계로 이행하면서 성장을 완료한다. 어떤 의미에서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헬레니즘 문명은 이미지로 빚어낸 상상계의 문화였다. 서구사회는 이후 이미지를 금하는 텍스트의 문화, 즉 헤브라이즘을 수용함으로써 상징계로 진화한다. 하지만 산업 이후 사회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상징계에서 상상계로 되돌아가는 퇴행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외모가 정말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진다면, 젊은이들이 외모를 고치는 데에 돈을 쓰는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 투자가 되는 셈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산업 이후 사회 변화에 맞추어 고전적 ‘자본’의 개념을 상징자본, 문화자본, 신체자본 등으로 다양화했다. 루키즘을 위한 투자는 신체자본의 일종이나, 야구선수의 팔, 피아니스트의 손처럼 신체의 기능이 아니라 순수한 외양에 투자한다는 의미에서 따로 미학적 자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가 행사하는 루키즘의 생체공학이다.
칸트의 말대로 미에 대한 판단은 미감적 판단이다. 그것은 이성이 개입되기 이전에 즉각적으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루키즘의 문화 속에서 한 인간에 대한 판단은 그가 누구인지 알기도 전에 시각적, 인상적으로 결정된다. 이것은 논리로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미에 대한 판단은 논리적 판단이 아니라 미감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프뤼네 앞에서 힘을 잃는 법률과 도덕처럼 아름다움 앞에서 상징계는 무력해진다. 선천적으로 운이 없고, 후천적으로 돈이 없는 이들에게 이처럼 우울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우울함 속에도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한 사람이 아름다운지 여부는 타인의 평가 못지않게 자기 평가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외모에 주관적으로 자신감을 갖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잘생긴 사람 못지않게 프리미엄을 누린다고 한다. 그러니 안 생긴 사람들이여,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지 당신은 잘생겼다고 굳게 믿으시라. 성경의 말씀대로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니라.”(히 1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