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라캉의 이론 중에 ‘거울단계’라는 것이 있다. 동물과 달리 사람은 생후 6개월이면 이미 거울 속의 모습이 자기 자신임을 인식한다. 물론 인간만 그런 능력을 가진 게 아니다. 성인 침팬지도 거울 속의 모습이 자신임을 인식한다. 침팬지가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는지 어떻게 아는가? 침팬지의 이마에 몰래 물감을 묻혀두면 된다. 침팬지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손으로 물감을 닦아내면 그것은 그가 거울 속 존재를 자신으로 여긴다는 증거다.
디지털 나르시시즘
하지만 침팬지와 아기는 거울 앞에서 각각 다른 행태를 보인다. 침팬지는 거울 속 모습이 자신임을 깨닫자마자 거울에 모든 흥미를 잃는 반면, 아기는 한없이 거울보기 놀이에 빠져든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유아는 자신의 신체를 늘 부분으로만 지각해 그것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즉, 유아는 지각적(sensory), 운동적(motory)으로 신체를 파편화된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거울을 보라. 거기에는 온전한 자아가 있지 않은가.
라캉은 이 거울의 체험을 자아(ego) 형성에 본질적 요소로 간주한다. 유아는 자신을 거울 속의 완전한 모습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아’를, 즉 자의식을 획득한다. 유아는 아직 지각적, 운동적으로 불완전하다. 따라서 유아가 자신을 거울 속의 완전한 상과 동일시할 때, 사실 상상계(le imaginaire) 속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하지만 현실과 상상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기에 동일시는 본질적으로 ‘오인 ’(m?conaissance)일 수밖에 없다.
처음에 라캉은 ‘거울단계’를 발달심리학의 명제로 제시했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 거울단계를 유아기만의 발생적 현상이 아니라 평생을 따라다니는 구조적 현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거울단계의 극단적 예는 역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다. 나르시스의 불행은 자신을 인지하는 순간, 즉 물에 비친 얼굴을 가리키며 “이게 바로 나”(Iste ego sum)라고 외칠 때부터 시작된다. 나르시스가 미남이라고는 하나 잘생긴 외모도 물에 비친 이상적 자아에는 빗댈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르시스에게 연못이 있다면, 오늘날 디지털 대중에게는 셀프 카메라가 있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자아의 사진은 포토숍을 비롯한 화상처리 프로그램을 거쳐 디지털 소비자에게 완벽한 상상계를 제시해준다. 인터넷에 올라온 셀카 사진과 실제 인물이 사실 얼마나 다른가? 이 불일치 앞에서 좌절을 겪는 것은 유아기 거울단계의 원체험에 속한다.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유아는 결국 자신을 이미지와 동일시하게 된다. 어디 아기들만 그러겠는가? 이미지로 구성된 디지털의 자아, 즉 아바타도 마찬가지다. 게임 속 캐릭터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완벽한 능력을 갖춘다. 플레이어는 저마다 이미지로 된 제2의 자아를 완벽으로 끌어올리는 일에 전념한다. 여기에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괴리가 존재한다. 적어도 게임이라는 상상계 속에서 그의 자아는 완벽에 도달한다. 현실에서는 매일 상사에게 구박받는 무대리도 게임 속에서는 타인의 추앙을 받는 용맹한 전사가 될 수 있다.
디지털 영상산업은 거울단계를 산업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산업의 동력은 물론 자신을 기꺼이 이상적 자아의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대중의 ‘오인’이다. 신화 속의 나르시스는 제 모습에 사로잡혀 식음을 전폐한다. 현실에도 이런 극단적인 예가 존재한다. PC방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게임에 몰입하다 죽음을 맞는 이들은 현실의 무능과 상상의 전능의 괴리 앞에서 과감하게 후자를 선택한 디지털의 나르시스다. 신화 속에서 물가의 나르시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죽음은 어렵지 않다. 죽음을 통해 내 고통을 덜 수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사랑하는 저것(제 물그림자)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이미지로서 신체와 죽음의 충동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이미지가 영원하기를 빌며 “저것을 내 신체에서 분리할 수 있다면…”이라 외쳤다. 현대인은 아예 신체 위에 영원한 이미지를 실현한다. 화장한 얼굴에서 메이크업의 두께는 초박막, 즉 현실과 상상을 가르는 얇은 막이다. ‘생얼’은 글자 그대로 앵프라맹스다. 20대 피부를 가진 어느 40대 여배우는 세안에만 무려 40분을 쓴다나? 이 노력으로 그는 얼굴에서 메이크업의 두께마저 지웠지만, 그렇게 관리된 생얼도 실은 사진만큼 허구적이다.
강남에 즐비한 성형외과는 상상계의 의료산업이다. 미용성형은 현실의 얼굴을 거울 이미지로 바꿔준다. 여기서 ‘동일시’는 심리적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배우는 ‘신’이라 불리기 위해 하루에 삶은 고구마 한쪽만 먹으면서 몸매를 만들었다. 이것은 ‘신’으로 표상되는 이상적 이미지를 신체에 걸치기 위한 고행이다. 상상이 현실을 지배할 때 신체는 거울이 된다. 오늘날에는 신체 자체가 이상적 이미지를 투사하는 스크린이 되었다.
이것은 또 죽음을 유예, 저지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전략이 정반대의 충동과 결합돼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 경우다. 나르시스는 이미 다이어트 사망을 예고한다. 오늘날의 나르시스는 ‘거식증’ 환자다. 거식증을 일으키는 심리적 기제는 무엇일까? 라캉이라면 동일시의 ‘욕망’(d?sir)이라 대답할지 모르겠다. 요구의 상관자는 ‘대상’이기에 그 대상을 얻자마자 충족되나, 욕망의 상관자는 ‘결핍’(manque)인데, 이것은 결코 충족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정말로 궁금한 것은 ‘선풍기 아줌마’의 경우다. 그는 아름다워지려다가 실패하자 얼굴에 테러를 가했다. 그 행동이 비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라고 그것을 몰랐겠는가? 중요한 것은 어떤 무의식이 그에게 그 일을 반복하게 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테러를 가하는 식으로 트라우마틱한 상황으로 반복해서 되돌아가려 했다. 왜 그랬을까?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그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의 충동’과 관련있다는 것이다.
‘쾌락의 원리’에 따르면 개인의 트라우마는 억지로라도 잊어야 할 끔찍한 상처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꿈을 통해 반복적으로 이 부정적 체험으로 돌아갔다. 왜 그랬을까? 프로이트는 여기서 ‘쾌락의 원리’ 너머에 또 다른 충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음의 충동’이 그것이다. 우리는 유기체이기 이전에 무기체였기 때문에, 생명으로 상승하려는 충동과 나란히 탄생 이전의 상태, 무기체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충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욕망의 상관자는 대상이 아니라 결핍이기에 그것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가령 아무리 살을 빼도, 아무리 성형을 반복해도, 현실의 육체는 결코 상상의 이데아에 도달할 수 없다. 이 사실 앞에서 나르시스는 자신의 신체를 버리고, 거식증 환자는 먹기를 거부하고, 선풍기 아줌마는 자신의 얼굴을 파괴했다. 현실의 몸으로 이상적 거울상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거울의 영원함을 위해 차라리 자신의 신체를 죽음의 충동에 내맡기기로 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