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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일상의 재현과 ‘영화적으로 재현된’ 일상

앵프라맹스

비행학교에 들어가느라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의사가 내게 숫자가 적힌 카드를 보여준다. 색맹 검사를 하려는 모양이다. 숫자와 배경의 색이 확연히 다른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으나, 갈수록 숫자와 배경의 색이 점차 비슷해지면서 숫자를 알아보기가 힘들어진다. 더러 실수가 나오면 의사가 다시 보라고 권한다. 정상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두 번째 시도에서는 자기의 실수를 정정할 것이다. 하지만 숫자와 배경의 색깔 차이를 그보다 더 줄이면 어떻게 될까? 정상적 시각을 가진 사람도 그 차이를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앵프라맹스, 지각 불가능한 미세한 차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미세한 차이. 이를 마르셀 뒤샹은 ‘앵프라맹스’(inframince)라 불렀다. ‘앵프라맹스’는 ‘아래’(infra)와 ‘얇음’(mince)의 합성어로, 마치 적외선(infrared)이라는 말처럼 가시적 영역 아래에 깔려 있어 지각할 수 없는 무한소의 차이를 가리킨다. 뒤샹에 따르면 앵프라맹스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그것의 예를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가령 권총이 발사되는 소리와 가까운 표적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 사이의 지각 불가능한 시간적 차이. 담배 연기를 들이마실 때에 따라오는 입 냄새의 구별 불가능한 감각적 차이 등.

앵프라맹스의 얇디얇은 막은 파타피지션들이 즐겨 활동하는 영역이다. 가령 보르헤스의 단편 <비밀의 기적>은 사형대 위에 선 작가가 총알이 발사된 직후부터 1년의 시간을 얻어 작품을 완성한 뒤에야 날아온 총알에 맞아 숨을 거둔다는 얘기를 담고 있다. 이는 묘하게도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와 표적에 구멍이 나는 순간 사이에 존재하는 지각 불가능한 차이’라는 뒤샹의 예를 연상시킨다. 파타피지션이라면 이 이야기에서 시간의 상대성에 관한 물리학 이론, 혹은 객관적 시간과 주관적 시간의 차이에 관한 철학 이론들을 잔뜩 끌어댈 것이다.

“사랑을 주고받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아무리 다가서도 얇은 빈틈이 생깁니다. 전위적 화가 마르셀 뒤샹은 그것을 ‘앵프라맹스’라고 불렀습니다.” 문화평론가 이어령은 앵프라맹스를 “인간으로서는 깰 수도 찢을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아주 얇디얇은 막”으로 규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성에서 영성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뒤샹의 맥락에서 지나치게 동떨어진 것이다. 뒤샹의 목표는 앵프라맹스를 극복하는 데가 아니라, 외관상 똑같아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그 얇디얇은 차이의 막을 드러내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앵프라맹스가 정의 불가능하나, 그것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헥토르 오발크라는 철학자는 뒤샹의 노트를 토대로 앵프라맹스의 세 단계를 구별한다. 첫 단계는 ‘물리적 의미에서 매우, 매우, 매우 얇은 막’을 가리킨다. 뒤샹은 이를 ‘종이 두께’에 비유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작가 임선이는 등고선이 그려진 얇은 지도의 종이들을 층층이 겹쳐서 3차원 입체 풍경을 만들어낸다. 뒤샹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한 작업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거의 지각이 불가능한 두께, 즉 앵프라맹스를 가시화하고 있는 셈이다.

앵프라맹스의 둘째 단계는 ‘쉽게 상상할 수는 있으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차이’를 말한다. 뒤샹은 이를 그림자의 두께에 비유한다. 물리적 의미에서 그림자에는 두께가 없다. 빛도 마찬가지다. 빛과 그림자의 놀이인 영화에서는 모든 사건이 그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얇은 막 위에서 벌어진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도쿄에서 본 어느 일본 미디어 아티스트의 작품이 생각난다. 우리는 모니터를 정면으로 보나 그는 모니터를 눕혀놓고 그 위에서 명멸하는 얇디얇은 전자파의 층위, 즉 앵프라맹스를 증폭시켜 사운드와 이미지로 보여준다.

앵프라맹스의 셋째 단계는 ‘지각할 수 없고 오직 상상만 할 수 있는 차이’를 가리킨다. 이 단계는 앵프라맹스의 본령이라 할 수 있다. 이 단계의 대표적 예로는 보르헤스의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피에르 메나르는 세르반테스 역작 <돈키호테>를 시대에 맞추어 다시 쓰나,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한 원고는 세르반테스의 원작과 구두점 하나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세르반테스와 피에르 메나르가 살던 시대의 해석학적 맥락의 차이가 이 소설을 서로 너무나 다른 것으로 만들어준다.

앵프라맹스와 파타피지카

여기서 우리는 뒤샹이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간 진짜 이유를 알게 된다. 그것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범상한 것(commonplace)을 예술작품으로 변용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대량생산의 산물, 즉 하나의 주형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똑같은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차이에 있었다. 사실 <샘>(1917)이라는 제목이 붙은 변기는 같은 공장에서 생산된 다른 변기와 물리적으로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샘>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주는 차이는 ‘지각할 수 없고 오직 상상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앵프라맹스의 탁월한 예가 된다.

임선이의 작품에서 개개의 등고선 지도는 합쳐져 하나 더 높은(n+1) 차원의 입체 풍경을 이룬다. 그렇다면 우리가 3차원 입체로 지각하는 대상들 역시 합쳐져 그보다 더 높은(n+1) 차원의 세계를 이루지 않을까? 예를 들어 뒤샹의 <샘>은 3차원 공간에서는 그저 물리적 대상일 뿐이나, 지각 너머에 존재하는 더 높은 차원에서는 다른 것, 즉 예술작품이 된다. 앵프라맹스를 통해 병 건조대나 자전거 바퀴를 더 높은 차원의 현실(?)에 등록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뒤샹이 실천한 레디메이드의 철학, 즉 레디메이드의 파타피지카다.

주사위를 던지면 1에서 6까지의 눈 중에서 하나가 실현된다. 그렇게 실현된 숫자를 우리는 ‘현실’이라 부른다. 하지만 던져진 주사위는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차이, 즉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실현될 수도 있었을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다. 우리가 ‘가상적’(virtual)이라 부르는 것은 어원상 동시에 잠재적인(potential) 것을 가리킨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현실의 대상 위에 가상적, 잠재적인 것의 앵프라맹스를 얹어놓는 기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인터페이스’라 부르는 것은 실은 기술적 박막, 즉 테크놀로지의 앵프라맹스라 할 수 있다.

앵프라맹스를 미학적 범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담은 영화들이 있다(가령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생각해보라). 이런 영화의 성패는 전적으로 앵프라맹스를 만들어내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가령 일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영화적으로 재현된 일상에는 재현되지 않은 일상과는 지각적으로 구별하기 힘들지만, 동시에 엄연히 존재하는 어떤 미세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 뒤샹은 그 차이는 미소할수록, 그리하여 관객에게 지각되기 힘들수록 효과가 더 강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