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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신세대 팔팔통신]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
2010-05-24

<기차를 세워주세요>, 전주국제영화제 숏숏숏 2010 <환상극장> 등을 연출한 한지혜 감독

영국 여행 중 찍은 원웨이 표지판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라는 책을 읽다보니 내 얘기가 쓰고 싶어졌다.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두살 무렵부터 기억하고 거기서부터 자신의 삶을 아주 가볍게 반추하기 시작한다. 나는 두살 무렵, 내 존재 자체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그의 나이 또한 세살 혹은 네살이었을 테니 그때 기억의 파편들을 찾아본다. 1985년에서 1986년 정도로 돌아가면 될까? 그래, 그때쯤이라면 분명 아무것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4살 무렵 나는 풀숲을 헤매고 있었다. 부천 중동에 이제는 고층의 무슨 팰리스 아파트가 줄지어 늘어선 주공아파트 단지였다. 그때 나는 정신없이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관리인이 없었던 아파트의 뜰에는 야생 잡풀들이 자라고 있었고, 키가 1m가 되지 않는 꼬마에게 그곳은 정글이었다. 6살의 남자애는 ‘여자’인 동생이 귀찮아 더 빨리 뛰었고 오빠를 뒤쫓던 아이는 결국 혼자 남게 되었다. 정글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암흑 같은 곳에 남겨진 꼬마는 주저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 울음소리를 들은 서른의 어머니가 창문을 열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아파트 뒤뜰이었다. 1986년, 우리 집 뒤쪽에는 정글이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오빠로 가득했다. 언제나 대장이었고 항상 동네 아이들의 ‘난’을 주도하던 요섭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는 요섭에게 인정받기 위해 엄마가 없을 때 치마를 가위로 잘라 찢어놓곤 했다. 결국 엄마는 나에게 바지를 입히기 시작했지만 못내 아쉬운 건 나에게 고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건 그냥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잊고 있었던 것들이 있다. 요즘 나는 그런 파편을 모아 재구성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파편만이 사실(정글, 쫓다, 오빠, 가위 따위)이고 나머지는 이야기(Fiction)일 뿐이다. 난 아마도 아주 긴 이야기를 쓰게 될 것 같다. 당신도 잠깐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자. 누구든 조그마한 파편을 모으다보면 나처럼 즐거워질지도 모르니까.

글·사진 한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