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영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던 시절, 우연히 이 광우의 콘서트에 간 적이 있다. 홍대 앞 카페를 빌린 공연장에서 제일 먼저 인상을 남긴 것은 발디딜 틈도 없이 홀을 가득 메운 관객.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무대 앞 좁은 공간에 서서 펄쩍펄쩍 뛰며 목청 높여 “허경영! 허경영!”을 연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연장 뒤쪽의 좌석에 고요히 앉아 계시던 60~70대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허경영 콘서트 관중의 어떤 세대차이
이 희한한 관객 분포가 허경영 신드롬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준다. 즉 무대 앞의 공간을 가득 메운 젊은이들에게는 허경영이 그저 새로운 종류의 ‘개그맨’일 뿐이다. 그들은 기존의 방송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개그에 열광하는 중이었다. 반면 뒤에 조용히 앉아 계시던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분들에게 허경영은 ‘정치인’, 즉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신과 업적을 계승한 민주공화당의 총재이시다. 그들은 이 존경(?)하는 지도자의 정치(?)행사에 초대받아 그 자리에 왕림하신 것이다.
여기서 개그와 정치는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는 정치인을 소재로 한 개그와는 애초에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정치인 행세를 하는 개그맨들을 알고 있다. 가령 김학도는 권영길 의원의 어법을 흉내내고, 박성호는 강기갑 의원의 외모를 흉내내고, 배칠수는 3김의 목소리를 흉내낸다. 그들이 아무리 똑같이 따라해도 그들은 여전히 개그맨으로 남을 뿐, 누구도 그들을 그들이 흉내내는 정치인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허경영은 어떤가? 그의 인격 속에서 개그맨과 정치인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개그다. 만약에 허경영이 민주공화당의 총재와 대통령 후보라는 진지한 배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의 개그는 빛이 바랐을 것이다. 그의 인기의 비결은 진지한 정치와 하릴없는 개그의 모순적 결합에 있다. 이것은 새로운 차원, 즉 존재론적-실존론적 차원의 개그다. 물론 젊은이들과 함께 그 자리를 지켰던 노인들은 경우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현장을 보러 왔으나, 그 인기가 매우 비범한(?) 성격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목하의 광경에 거북스러워하는 중이었다.
가상 보기를 현실보듯
누나한테 들은 얘기다. 베를린 공대의 스튜디오에서 어떤 독일 신사를 만났단다. 그는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살았던 한 작곡가를 기리는 모임의 회장이었는데, 재미있게도 그 작곡가는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이 모임은 그동안 작곡가들에게 17세기풍으로 곡을 써달라고 의뢰한 뒤, 그 곡을 그 가상의 작곡가의 이름으로 발표해왔다. 그날은 그렇게 작곡한 곡들을 음반으로 만들러 온 것이라 하는데, 녹음이 끝나자 신사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더란다. “그분이 지금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신사는 물론 자신이 추모하는 그 작곡가의 실존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가 실제로 살았던 인물인 것처럼 행세한다. 이런 태도를 가리켜 ‘파타피지컬’하다고 말한다. 허경영을 대하는 젊은이들의 태도는 정확히 이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 역시 결코 허경영이 하는 말이 진실이나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들은 이 광우의 말이 순도 100%의 순수 헛소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치 그의 말을 진짜로 믿는 듯이 행동한다. 허경영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태도는 한마디로 ‘파타피지컬’하다.
이 새로운 취향이 등장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일 것이다. 지난번에 얘기했던 것처럼 은유와 사실, 가상과 현실을 중첩시키는 ‘파타퍼’는 오늘날 아예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원리가 되다시피했다. 게다가 모바일 기술의 발달로 언제, 어디서라도 현실의 층위에 가상의 층위, 즉 정보의 층위를 겹쳐놓을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나서부터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세대에게 가상 보기를 현실처럼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광우와 현대의 광우
허경영 현상을 바라보는 데에는 두개의 극단이 있다. 하나의 극단은 허경영의 말이 참이라고 ‘진지하게’ 믿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극단은 허경영의 말이 허위라고 역시 ‘진지하게’ 폭로하는 것이다. 파타피지컬한 모드는 이 두 가지 극단의 중간에 존재한다. 파타피지컬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허경영의 말이 참이라고 믿지 않으나, 그렇다고 그의 말이 허위라고 요란하게 떠들고 다니지도 않는다. 왜? 허경영이 공중부양을 못한다는 것은 굳이 폭로할 가치가 있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 <조선일보>에 실렸던 기사를 인용해보자. “전문가들의 입장은 어떤가? 지금 현상을 두고 전문가들 역시 의견은 분분하지만 21세기 종교현상이라고 해석한다. 평소에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은 인간의 의존증세를 부추기고 있다는 분석이다.” 내가 보기에 진지한 의미에서 우려해야 할 사태는 이런 것을 “분석”이라고 내놓는 또라이들이 이 사회에서 버젓이 “전문가” 행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압권은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다. “허경영을 외치면 진짜 로또 1등에 당첨될 수 있을까?”
언젠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허경영 현상을 다룬 바 있다. 그런데 정작 PD가 알고 싶은 ‘그것’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듣자하니 정작 방송에 나간 것은 엉뚱한 것이었다고 한다. 허경영에게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는 둥 그에게 돈을 떼인 사람이 있다는 둥. 이 방송이 나간 뒤 허경영에게 피처링을 해준 모 래퍼가 “후회한다”는 고백을 하는 등 일련의 촌스러운 사건들이 이어졌다. 이렇게 웃어넘길 일에 정색을 하고 덤벼들어 분위기 깨는 사람을 ‘놀이 망치는 이’(Spielverderber)라 부른다.
‘나는 IQ 430이다’, ‘나는 축지법을 쓴다’, ‘공중부양도 할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보좌관이었으며, 박근혜와 결혼할 사이였다’, ‘조지 부시와 만나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논의했다’, ‘성욕을 억제하기 위해 마늘을 먹는다’, ‘내 눈을 바라봐, 내 이름을 불러봐. 그러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야’. 이런 것은 정색을 하고 폭로할 가치가 있는 허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을 허위라고 폭로하는 행위는 마치 세상을 향해 ‘산타클로스는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색하고 진지하게 외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허경영은 파타피지션인가? 내가 보기에 허경영 현상은 파타피지컬하나, 허경영 자신은 파타피지션이 아니다. 파타피지션은 자신이 늘어놓는 얘기가 조크라는 것을 안다. 파타피직스는 논리 ‘이하’의 현상이 아니라, 논리 ‘이상’의 현상이다. 파타피지션들은 논리의 위에 서서 논리를 가지고 논다. 허경영은 이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외려 중세와 근대 초에 유럽에 존재하던 광우(狂愚)에 가깝다. 파타피지션이 그저 논리 회로를 정상과 다르게 사용한다면 광우는 아예 신경세포의 연결 자체가 일반인과는 다르게 되어 있다.
파타피지션에 가까운 것은 외려 그를 보고 열광하는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허경영이 보여주는 것이 정치의 패러디라는 것을 안다. 그들은 허경영이 보통 정치인들과 너무 달라서 열광하는 게 아니라, 그가 보통 정치인들과 너무나 똑같아서 열광하는 것이다. ‘결혼하면 1억원을 준다’는 허경영의 공약과 ‘결혼하면 아파트를 반값에 준다’는 이명박의 공약이 사실 뭐가 다른가? 그런 의미에서 젊은이들이 허경영에게 환호를 보낼 때, 그들은 실은 그로써 이 사회의 부조리에 야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