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웍스가 만든 <드래곤 길들이기>는 드림웍스란 회사명과 거리가 먼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니까 말많은 캐릭터들이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인 척 현실세계를 풍자하고, 온갖 패러디를 일삼을 것이라는 선입견과 아예 선을 그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얘기다. 고전적인 판타지 모험극을 기반으로 용과 소년의 우정을 그린 <드래곤 길들이기>는 픽사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감동과 아름다움, 그리고 3D기술의 진보를 모두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목만 듣고는 아동용에 지나지 않을 듯싶었던 이 애니메이션이 성인 관객에게까지 선사하는 놀라움은 과연 무엇일까. <드래곤 길들이기>를 둘러싼 열광적인 호평의 실체를 미리 파악해보았다.
드림웍스의 3D CG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에 열광할 만한 이유
올해 꼭 봐야 할 단 한편의 애니메이션이 있다면 그건 <토이 스토리3>일 것이다. 어쩌겠는가. CG애니메이션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첫 작품의 세 번째 시리즈이고, 무엇보다 픽사의 작품이다. 물론 <슈렉>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인 <슈렉 포에버>도 있다. 하지만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상징과도 같은 이 시리즈는 3편에 이르러서도 고전을 패러디하고 비꼬는 전략을 재탕하면서 자가당착의 함정에 빠졌다. 재탕을 반복한다는 점에서는 <토이 스토리3>도 할 말이 없다. 그렇다 해도 매년 여름 기대 이상의 선물을 선사하는 픽사의 작품을 고대하는 건 마땅하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선수가 나타났다. 지난 3월 미국에서 개봉한 <드래곤 길들이기>다. 디즈니에서 <릴로 & 스티치>를 만든 딘 데블로이스와 크리스 샌더스가 드림웍스에 와서 만든 그들의 첫 CG애니메이션이자 3D애니메이션인 이 작품은 개봉 첫 주말 3일 동안 4373만달러의 수입을 벌어들이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97%에 달한 로튼토마토지수는 82%에 그쳤던 <아바타>를 넘어섰다. <롤링 스톤>의 피터 트래버스는 “어린이용 영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당신을 그 매력에 푹 빠지게 할 정도로 3D애니메이션의 기적을 이뤄냈다”고 평했다. 두통과 멀미를 유발한다는 이유로 3D를 싫어한다는 로저 에버트조차 <드래곤 길들이기>에는 별 4개 중 3개를 주었다. “길들여진 용과 사악한 용의 공중전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캐릭터와 이야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을 들인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장면은 밝고, 보기 좋고, 강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
대놓고 내세울 만한 스타배우의 목소리 연기도 없다. 원작이 <해리 포터>만큼 폭발적인 팬덤을 가진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흥행이나 비평에서 픽사보다 한수 아래로 평가받았던 드림웍스가 친 사고라는 점에서 <드래곤 길들이기>는 정체가 궁금한 애니메이션이다. 픽사와 양강체제를 이루면서도 픽사를 능가하지 못했던 드림웍스가 이번에는 정말 픽사에 대적할 만한 작품을 내놓은 걸까. 일단은 <토이 스토리3>와 <슈렉 포에버>의 대결을 기대할 때, 드림웍스가 <드래곤 길들이기>로 선공을 날린 건 분명해 보인다.
아동용 소재에 ‘집단간 소통의 부재’란 주제 더해
<드래곤 길들이기>의 원작은 영국 작가 크레시다 코웰이 2003년에 펴낸 초등학생 고학년 대상의 동명 소설이다. 바이킹이 모여 사는 마을을 배경으로 멋있고 우람한 바이킹이 되고 싶지만, 근육도 없고 용기도 없는 소년 히컵이 용을 길들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원작의 배경과 캐릭터만 가져온 <드래곤 길들이기>는 히컵이 살고 있는 버크 섬을 침략한 용들과의 한판 전쟁으로 시작한다. 손재주는 있지만 싸움재주가 없는 히컵은 자신이 만든 돌팔매 투척기로 용 한 마리를 쓰러뜨린다. 다음날 히컵이 발견한 용은 용 중에서도 가장 무섭다는 ‘나이트 퓨어리’다. 히컵은 용을 죽여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영웅심을 뽐내려 하지만, 목숨을 체념한 듯한 용의 눈빛을 보고는 칼을 내려놓는다. 이 일로 둘은 친구가 되고 히컵은 이빨이 없는 용에게 투슬리스(toothless)란 이름을 붙여준다. 한편, 바이킹 족장인 아버지의 강요로 바이킹 훈련에 참가한 히컵은 수많은 용들과의 대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투슬리스와 함께 놀면서 용의 생태적 습성을 파악한 히컵은 훈련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마을의 바이킹은 일생을 바쳐 용과의 전쟁을 벌여야 하는 숙명에 놓여 있다. 히컵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적 과제와 친구인 투슬리스와의 관계 속에서 고민에 빠진다.
사실 <드래곤 길들이기>의 이야기는 관습적이라고 할 만큼 상당히 고전적이다. 기존의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에 비해서도 스토리의 개성이 덜한 편이다. 외롭고 나약한 소년과 그에게 찾아온 미지의 친구가 만드는 우정의 서사는 이미 스티븐 스필버그가 <E.T.>로 정점을 찍은 이야기이고, 그외에도 전세계 수많은 영화들이 육해공의 모든 동물들을 활용해 담아낸 소재다. <드래곤 길들이기>를 연출한 두 감독의 전작인 <릴로 & 스티치>도 고아 소녀와 외계 생명체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딘 데블로이스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브래드 버드의 <아이언 자이언트>도 모험을 갈구하는 소년과 어느 날 지구에 떨어진 로봇과의 만남을 담고 있다. 소년과 말의 교감을 그린 캐럴 발라드 감독의 1979년작 <검은 종마>에 대한 인용은 좀더 직접적이다. 공동 연출자인 크리스 샌더스는 말했다. “<E.T.>나 <검은 종마>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특히 <검은 종마>는 나나 딘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우리는 히컵이 투슬리스의 얼굴을 처음 만지는 장면을 구성할 때 이 영화를 이야기했다. 해변에서 함께 석양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드래곤 길들이기>는 용과 인간의 관계를 다층적으로 묘사하면서 이야기의 진부함을 넘어선다. 버크 섬의 바이킹들은 용들의 무시무시한 습격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모든 용은 가공할 공격력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발견 즉시 죽여야만 하는 게 이곳의 규율이다. 그 속에서 히컵과 투슬리스는 금지된 우정을 키워간다. 말하자면 적과의 동침. <드래곤 길들이기>는 적을 대하는 서로 상반된 입장을 묘사하면서 꽤 진지한 주제를 드러낸다. 히컵은 투슬리스를 통해 용을 이해하면서 용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이 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족장인 아버지를 승계해야할 그는 적에 대한 이해를 통해 전쟁을 종식시키려 노력한다. 만약 이 부분에서 이라크를 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떠오른다면 그건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아동 관객과 성인 관객을 고루 매료시킬 테마라는 건 분명하다. 딘 데블로이스 감독은 말한다. “물론 <드래곤 길들이기>는 당신을 즐겁게 하려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적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는 테마를 추가하면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담게 됐다. 원작이 10대 초반의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면 우리는 그보다 좀더 나이 많은 아이들이 대상일 것이다.”
친근한 캐릭터 디자인과 괴수영화 못지않는 액션
<드래곤 길들이기>는 용과의 우정, 그리고 용과의 전쟁이 공존하는 긴장감을 위해 크리처 디자인과 액션 시퀀스의 구성에서도 양면적인 모습을 담아냈다. 그중에서도 익숙한 이야기에 대한 핀잔을 무색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애완의 욕망을 느끼게 만드는 용의 외모다. 검은 피부와 노란색 눈동자를 가진 투슬리스는 흑표범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디자인이다. 때에 따라 무서운 맹수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고양잇과 동물이라는 특성상 가진 귀여운 모습도 있다. 그런가 하면 히컵이 훈련과정에서 만나는 ‘그롱클’은 뚱뚱한 악어처럼 생겼고, 그 때문에 비호감이지만 때로는 외모가 가진 유머가 매력적인 캐릭터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이들과 인간과의 전쟁을 통해 그들이 가진 가공할 공격력을 묘사한다. 빠른 속도와 강한 힘, 불을 뿜는 위력을 드러내는 액션 시퀀스는 괴수영화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미국에서 PG등급(어린이의 경우 부모의 동행을 권고하는 영화 등급을 뜻함. 우리나라의 12살 이상 시청가)을 받았다. 픽사의 <인크레더블>이 픽사 최초의 PG등급 애니메이션이었다는 사실은 <드래곤 길들이기>의 액션 시퀀스가 가진 박력을 가늠할 수 있는 힌트일 것이다.
미지의 친구와 나누는 우정뿐만 아니라. 신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모험을 그리고 있다는 점 또한 <드래곤 길들이기>가 간직한 고전적인 풍미다.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 시리즈 이전의 1980년대 할리우드 판타지영화들, 예를 들어 <네버엔딩 스토리>(1984)나 <용과 마법구슬>(1981) 같은 작품의 결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3D는 <드래곤 길들이기>가 그려낸 판타지의 공간과 쾌감을 강하게 인식시키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중에서도 <드래곤 길들이기>의 ‘진미‘라 할 순간은 히컵과 그가 사랑하는 아스테리드가 투슬리스를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이다(비행 시퀀스는 흔히 3D영화에 가장 적합한 액션으로 꼽힌다). 하늘과 바다를 오르내리는 쾌속의 활강이 현기증과 흥분을 동반하고 나면 투슬리스가 공중에 몸을 맡기는 순간이 이어진다. 이때 석양과 구름의 한복판에 떠 있는 그들을 비추는 장면에서 진가가 드러난다. 그것은 픽사의 애니메이션에는 있었으나, 드림웍스에는 없었던 것. 어쩌면 드림웍스가 아예 잊고 있었거나 거부했던 애니메이션만의 ‘아름다움’ 이다.
애니메이션만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살아나고
여러모로 <드래곤 길들이기>는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전략적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창립작인 <개미>부터 드림웍스는 성인 취향의 패러디와 현실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은유를 활용해왔다. 그것은 픽사와 구별되는 드림웍스만의 개성이었고, 애니메이션의 관객을 성인층으로 넓히는 전략이었지만, 픽사의 작품과 비교할 때 오히려 풍부한 만족감을 주기 힘든 전략이기도 했다. 심지어 정치적 공정성과 묵직한 메시지를 드러내는 차원에서도 픽사의 작품이 품위와 재미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은 드림웍스의 전략에 의문을 가져왔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3D라는 최첨단 기술을 활용하면서도 애니메이션이 전할 수 있는 고전적인 매력에 눈을 뜬 <드래곤 길들이기>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경쟁체제의 또 다른 변화를 예상하게 만드는 아니, 어쩌면 관객은 이 영화의 마지막 결론에서 픽사에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놀라움을 얻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픽사가 전해온 낙천주의와도 구별해야 할 따뜻한 엔딩이다. <토이 스토리3>와 <슈렉 포에버>가 개봉을 앞둔 현재, 올해의 애니메이션은 <드래곤 길들이기>로 꼽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우정도 못지않다! <드래곤 길들이기>가 선망한 영화 속 커플들
<아이언 자이언트>(1999) 픽사에서 <인크레더블>과 <라따뚜이>를 연출한 브래드 버드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데뷔작이다. 1957년, 미국 냉전시대가 배경이다. 미지의 친구는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지구에 불시착한 로봇이다. 소년에게는 더없이 좋은 친구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적으로 규정하던 당시 미국의 사고방식이 둘을 갈라놓는다. 타자에 대한 무지가 불안이 되고, 그것이 공격성으로 드러나는 풍경은 “모든 용은 발견 즉시 죽여야 된다”는 버크 섬의 경구와 통하는 부분이다.
<검은 종마>(1979) 아버지와 여행을 하던 소년 알렉은 배에서 아라비아산 검은 종마를 만난다. 그런데 배가 침몰하면서 소년과 말은 무인도에 함께 남게 된다. 서로에게 하나씩 도움을 주던 이들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모습은 별다른 대사없이 행동과 상황으로만 연출된다. 그들의 교감이 갖는 따뜻한 정서는 <드래곤 길들이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투슬리스는 흑표범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지만, 이 영화를 사랑한 두 감독은 영화 속 말의 검은 피부를 탐냈을지도 모른다.
<E.T.>(1982) <드래곤 길들이기>가 <E.T.>에서 선망한 장면이 있다면 분명 달을 관통하는 비행 시퀀스일 것이다. 극중에서 이 장면은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이자, 주인공 엘리엇과 이티의 우정을 아름다운 비주얼로 승화시킨 순간이다. 크리스 샌더스 감독은 <드래곤 길들이기>의 프로젝트를 맡게 됐을 때, “특히 비행 시퀀스에서 가장 큰 흥분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가 <E.T.>를 떠올린 건 당연하다. 우정의 서사에서나, 비행 시퀀스의 정서적 깊이에서나 선망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