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을 다녀왔다.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및 제작사 워킹 타이틀 취재가 끝난 다음, 워털루 다리쪽으로 향했다. 선배가 “하루 동안 볼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내셔널 갤러리나 모던 테이트가 아니라 쿠토 갤러리를 가라”고 권한 덕분이었다.
고흐의 <귀잘린 자화상>에서, 잔뜩 웅크린 채 뒤틀린 자존심과 결기 하나로 쏘아보고 있는 고흐의 시선이 그토록 강력한지 처음 알았다. <화장하는 젊은 여인>에서 섬세하게 식별할 수 있는 조르주 쇠라의 붓터치 하나하나가 그토록 정교한 계산으로 이뤄진 줄 처음 알았다.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바>에서, 그 거울 속 기이한 구도와 방향과 인물들의 드나듦이 그토록 풍요로운지 처음 알았다. 에드가르 드가의 <무대 위 두 댄서>가 포착하는 찰나의 현재성이 그토록 생생하고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다. 평일 낮이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언제든 볼 수 있는 상설 소장품이기 때문일까,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맘에 드는 그림 앞에선 몇 십분이고 감상이 가능했다. 그곳에 머무르는 네 시간 동안, 참으로 평화로웠다.
미술관을 나서면서 까닭모를 우울증이 덮쳤다.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여 행복했는데 왜 이럴까. 한참을 생각했다.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5주념 기념 공연 때도 그랬다. 전경들이 곤봉으로 노동자들을 구타하는 장면이 거리낌없이 등장하고, 마거릿 대처 전 총리를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그 공연을 영국 관객은 ‘가족 단위’로 편안하게 감상했다. 그들은 즐겁게 웃었고 때때로 동조의 휘파람을 불었다. 그들은 마음만 내키면 언제든 쿠토 갤러리에 들러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걸작을 단돈 6파운드로 감상할 수 있고 그토록 희귀하다는 드가의 조각품도 뜯어볼 수 있으리라. 못난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뭔가 불공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치적 올바름과 문화적 토양이 이렇게 풍요롭고 아무렇지 않고 ‘큰 마음’을 먹지 않아도 섭렵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의 나와 훨씬 다르지 않았을까. ‘유럽인’을 무작정 동경하는 판타지가 아니라 지금까지 부지런히 살아왔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차원의 부분이 언제나 존재했던 건 아닐까, 싶은. 런던은 무척 즐겁고 흥미로운 곳이었지만, 동시에 내게 해소될 수 없는 불안감과 근본적인 결핍감을 안겨주었다. 나는 전전긍긍하며 서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