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맛도 모르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영화 촬영현장에서는 감독 의자에 앉아 배우들을 쥐락펴락했을 우리나라 최고 감독 두 사람이 맥주 맛도 모른다며 배우의 핀잔을 듣는다. 현재 TV광고로 방송 중인 하이트맥주의 맥스(Max) CF 얘기다. ‘절친’이었던 고 이훈 감독의 <마스카라>(1995)에 옆집 남자아이를 ‘성’에 눈뜨게 해주는 아저씨로 우정 출연해 알 듯 모를 듯 혼신의 내면 연기를 펼친 이래 연기활동을 쭉 자제해왔던 박찬욱 감독, <피도 눈물도 없이>(2002)의 껄렁대는 취조 경찰과 <미스 홍당무>(2008)의 능청스런 학원 수강생으로 나와 놀라운 순발력을 보여줬던 봉준호 감독이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남이 쓴 콘티와 대사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직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라는 자부심과 사명감 때문이다.
(1) 어느 날 촬영장에서… (박찬욱 감독과 김혜수)
박찬욱: 혜수씨, 이 분노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자 하는 욕망은 이해해…. (중략) 음, 그래야만 하는 페이소스? 뭐랄까 그 맛이…. 김혜수: 방긋 웃어요? 말이 너무 어렵다. 맥주 맛도 모르면서.
(2) 어느 날 술자리에서… (봉준호 감독과 원빈)
봉준호: 길에서 누가 나보고 아줌마라 그러더라. 원빈: 머리 좀 어떻게 하시라니까. 봉준호: 베토벤! 아인슈타인! 자유로운 영혼과 자유로운 발상! 원빈: 갖다 붙이긴, 어디 막 갖다 붙여요. 맥주 맛도 모르면서.
김혜수의 ‘엣지’ 있는 표정에 박찬욱 감독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봉준호 감독을 졸지에 덩치 큰 아줌마로 만든 이 광고는 바로 영화인 12명이 노 개런티로 출연하는 릴레이 광고의 첫 번째 두 광고다. ‘맥스가 영화인들과 함께 시네마테크 건립을 후원합니다’라는 마지막 자막에서 보듯 대한민국 대표 감독과 배우들이 최근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서울아트시네마의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힘을 뭉친 것이다. 후원 광고를 해보자는 의견이 처음 나온 게 지난 1월쯤이었으니 촬영과 방송에 이르기까지 정말 일사천리로 이뤄진 셈이다. 물론 광고 개런티 전액을 그대로 기부하는 형태다. 그만큼 시네마테크의 안정적 운영을 기대하는 영화인들과 관객의 바람이 컸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맥주 맛에 눈뜨다’라는 광고 카피처럼 영화인들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자신들의 요구에 눈뜨길 원하고 있고, 감독에게 핀잔을 주는 배우의 모습은 또한 영진위를 향해 충고하려는 많은 영화인들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최근 영진위가 기어이 시네마테크 전용관 운영사업을 공모제로 전환하기로 하면서 많은 영화인들의 큰 반발을 샀는데, 기존 운영자인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2002년 민간 주도로 시작된 시네마테크를 공모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며 공모에 응하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박찬욱, 봉준호, 최동훈, 윤제균, 류승완 감독 등 국내 대표 감독들이 참여해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됐고, 현재 서울아트시네마가 임대해 사용 중인 허리우드극장과는 3월 말까지 계약돼 있어 관객도 자발적으로 시네마테크 지키기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렇게 모인 후원금 등을 통해 아트시네마는 공모에 응하지 않고 당분간은 독자적인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됐다.
물론 궁극적인 목표는 전용관을 세우는 것이다.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이번 광고는 장기적으로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으로 나아가기 위한 건립추진위의 첫 번째 사업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라며 “제안에서부터 촬영, 방송까지 이렇게 순식간에 이뤄질지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하이트맥주 마케팅팀 신은주 상무도 “한국인들의 오랜 사랑을 받아온 ‘대한민국 대표맥주’라는 자부심과 대한민국 대표감독들의 사명감이 만난 흥미로운 경우”라며 “회사 차원에서도 공익적인 기여 방법을 모색하던 차에 이런 좋은 기회가 생겼고 향후 그 취지에 공감하며 지속적으로 윈-윈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싶다”고 말했다.
감독의 카리스마 망가져도 기꺼이
시네마테크를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영화인들이 CF에 출연하면 어떨까, 라는 제안은 딱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작됐다. 구체적으로는 시네마테크 건립추진위 명예위원이기도 한 씨네2000 이춘연 대표가 ‘과거 스크린쿼터 운동을 위한 기금을 마련할 때도 감독들이 모여 CF를 촬영한 적 있다’며 얘기를 꺼냈고 모두들 좋은 아이디어로 받아들였다. 감독들 중에서는 CF 촬영 경험이 가장 많고 활동력 또한 가장 왕성한 류승완 감독이 ‘에이전시’를 자처하면서 제안은 속도를 타게 됐다. 그러면서 비슷한 시기 공익적인 사업을 구상 중이던 하이트맥주 맥스와 운좋게 연결됐고, ‘영화사 집’의 이유진 대표가 실무를 담당하는 총괄 프로듀서 형태로 참여하면서 광고 제작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유진 대표는 “아무래도 최대 효과를 낼 수 있게 규모를 키우려면 감독과 배우가 함께 출연하는 형태가 좋을 것이라 판단했고, 그렇게 동참할 감독과 배우들을 섭외하다 엮이게 됐다”며 “후원 자막이 들어가는 공익적인 광고이되 딱딱한 내용을 지양하고 재미있게 가보자고 의견을 모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류승완, 최동훈 감독과 배우 김혜수, 원빈, 류승범, 공효진, 하정우, 박시연, 이민기 등 총 12명의 라인업이 꾸려졌다. 그리고 감독과 배우를 각각 적당히 짝지으면서 5편을 순차적으로 만들기로 했다. 물론 마음만큼 모든 조합이 원하는 대로 이뤄진 건 아니다. <마더>의 봉준호와 원빈이 함께한 것처럼 <박쥐>의 박찬욱과 송강호, <전우치>의 최동훈과 강동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김지운과 이병헌이 함께한다면 최상의 그림일 테지만 현재 송강호, 강동원, 이병헌은 각각 타 주류업체 모델로 활동 중이라 함께할 수 없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무려 5명의 감독이 출연진에 포함됐지만 모든 대사와 콘티는 맥스쪽 프로덕션에서 완성했으니 그들은 철저히 배우로만 참여한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영화에 관한 한 깐깐하기로 이름난 그들이 순한 양처럼 밤샘 촬영에 임한 것도 오직 시네마테크를 위하는 마음 하나 때문이다. 방송되는 분량 자체는 15~20초에 불과하지만 박찬욱, 봉준호 감독 모두 새벽 늦게까지 촬영에 임했다. “박찬욱 감독님은 김혜수씨에게 ‘잘 리드해줘서 고맙다’며 연방 훌륭하다고 감탄했고, 봉준호 감독님은 망신살 뻗쳤다며 너무 괴로워하시더라”는 게 이유진 대표의 얘기다. 망가지는 컨셉임에도 놀라운 의무감으로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영진위에게 날리는 시네마테크 친구들의 멋진 한방
이번 광고는 시네마테크 건립추진위의 성공적인 첫 발자국이라 할 수 있다. 공모에 응하지 않기로 한 서울아트시네마에 진정으로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하게 된 순간 많은 영화인들이 적극적으로, 그리고 ‘빨리’ 움직여준 거다.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과거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수호운동이 산업적 측면과 결부된 측면도 컸다면 이번 일은 순수하게 문화적 측면의 사안이다. 말하자면 아트시네마가 그들의 영화를 상영해주는 곳도 아니니까 그들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일을 벌여줬으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감독님들께 너무 빚진 게 많고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게 없다”며 “이처럼 감독과 배우들이 함께 나서서 여러 번에 걸쳐 이런 형태로 지원, 후원을 하는 사례가 전세계적으로도 드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영화계 전체가 자긍심을 가져볼 만한 하나의 ‘사건’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신은주 상무도 “다른 광고와 마찬가지로 우리 입장에서는 늘 해오던 대로 광고를 집행하고 지출하는 형태였다면 이런 노 개런티 참여를 통한 실질적인 기부는 영화인들 스스로 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그 좋은 취지에 동의하고 동참하는 게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영진위는 더 큰 부담을 안게 됐다. ‘2010년 시네마테크 전용관 지원사업 운영자 선정 2차 공모’마저 마감일이었던 지난 3월19일까지 아무도 지원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허사로 돌아간 상황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괜한 고집 때문에 ‘뻘쭘함’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스스로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 반대로 아트시네마로서는 운영의 향방을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중대한 시점, 그러니까 연간 4억5천만 원 정도의 지원금이 중단된 상황에서 재정적 독립으로 나아갈 수 있는 든든한 힘과 자부심을 얻게 됐다. 아트시네마는 이후 4월 말경 시네마테크와 관련된 포럼을 열고 5월 중순경에는 광고에 참여한 영화인들과 함께 전용관 건립과 관련된 행사를 열 예정이다. 그 모두가 본질적으로 전용관 건립을 향한 준비 작업들이다. 영진위가 계속 헛발질하던 사이 시네마테크와 그 친구들은 멋진 슛 한방을 날렸다.
자, 이제 누가 망가질 테냐
월드컵 이전까지 공개될 3, 4, 5편은 어떤 내용?
김지운, 류승완, 최동훈 감독이 출연한 3편, 하정우와 공효진이 호흡을 맞춘 4편, 마지막으로 류승범, 박시연, 이민기가 모인 5편도 촬영을 끝내고 곧 방송을 탈 예정이다. 이처럼 나머지 3개 에피소드는 감독과 배우의 대결 구도였던 전편들과 다르다. ‘감독편’이라 할 수 있는 3편에서는 세 감독이 모여 ‘예전 현장은 장비도 변변치 않았어’ ‘그냥 밀어붙였지’라고 과거를 회고하는 가운데, 실제 최동훈 감독보다 나이는 2살 어리지만 먼저 입봉한 선배인 류승완 감독,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하정우와 공효진이 입담을 과시하는 4편에 이어 마지막 5편은 월드컵 시즌을 겨냥해 류승범, 박시연, 이민기가 모여 축구 얘기를 나눈다. 그렇게 나머지 3개 에피소드는 최종 편집을 마친 다음 월드컵 이전까지 순차적으로 공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