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붉은 죽음의 가면>은 왕이 개최한 호화로운 가장무도회에, 백성들 사이에 창궐하는 적사병(赤死病) 환자로 분장한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무언의 도발에 분노한 왕은 돌아선 그의 얼굴을 직면하는 순간 즉사한다. 역병으로 죽은 시체를 모방한 줄 알았던 가면은 가면이 아니었다. 불청객은 다름 아닌 적사병 그 자체였다.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1860~1949)가 즐겨 그린 가면 쓴 인물들의 초상화가 오싹한 까닭도 그들이 가면을 쓴 인간인지, 가면처럼 변해버린 얼굴을 가진 인간인지 불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앙소르의 그림 속에서는 가면과 얼굴의 구분과 더불어 현실과 환영의 경계도 희부연 산란광과 취기 속에 온통 희미하다.
<이상한 가면들>에 도열한 마스크들도 가면이라기보다 축제의 열기에 휩싸여 우연히 노출된 사람들의 진짜 표정처럼 보인다. 안면근육과 주름살, 뺨에 떠오른 홍조는 가면이라기엔 지나치게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화면 왼쪽 창밖으로는 앙소르의 고향인 해안 마을 오스텐데의 사실적 풍경이 보이는데, 마지막 회동의 기념사진이라도 찍듯 부자연스럽게 정면을 향한 가면들의 포즈는 초현실적이다. 진줏빛 태양광이 방 안을 가득 채운 대낮인데도 촛불을 들고 있는 왼쪽 인물의 행동이나, 바닥에 널브러진 가면과 의상인지 사람인지 분별할 수 없는 맨 오른쪽 인물의 모습은 화면에 환상성을 불어넣는다. 오스텐데는 휴가철에만 사람이 몰리고 연례 가면 축제가 열리는 휴양지였다. 적막은 더욱 적막하게 느껴지고 소란은 더욱 소란스럽게 느껴지는 고장. 마을 자체가 사회의 방외에 있는 듯한 공간. 이곳의 다락방을 평생 작업실로 삼았던 화가에게 한철 몰려드는 군중의 존재는 보통보다 훨씬 위압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게다가 앙소르의 집안은 해골과 꼭두각시 인형, 카니발 가면 등속을 파는 기념품 가게였다. 앙소르에게, 유희의 광기에 달뜬 이방인들의 군상을 표현하는 데에 가면보다 자연스런 오브제는 없었을 것이다.
집에서 입는 옷과 거리로 나설 때 입는 옷이 다르듯 우리는 군중의 일원이 될 때 가면을 쓴다. 그러나 가면을 쓴 개인은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고 타인들의 가면만 본다. 도어즈는 노래했다. “당신이 이방인일 때 사람들은 이상하게 굴고, 당신이 외로울 때 타인의 얼굴은 흉해 보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가면처럼 경직돼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고 자신도 그렇게나 혐오했던 군중의 일부임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자신의 예술을 인정하지 않는 평단과 뭇사람들을 가면을 쓴 우중(愚衆)으로 묘사했던 앙소르는 역설적이게도 중년 이후 세속적 성공이 찾아와 세상이 그를 끌어안자 급속히 창작 에너지를 상실했다. 세상의 얼굴에서 가면을 보는 눈이야말로 예술가의 보루라는 교훈일까?